그 무렵 전기공업회사에 다니는 내 일본인 친구가 있었는데 그 회사에 놀러 갔다가 청산가리를 훔쳤다. 그리고 충동적으로 마셔버렸다. 다행히 공업용이라 그랬던지 금방 죽지 않았다. 정신이 조금 들었을 때 미국 지프를 개량한 경찰차가 와서 나를 실었다. 죽기도 쉽지 않았다.
어느 날 미국 치과의 출신 선교사가 내게 물었다.
“예수님을 더욱 더 확실히 알면 형제의 삶의 목표가 명확해질 것 같네. 우리를 강건케 해주시는 하나님 안에서 평생 신앙으로 함께 하지 않나? 미국에 가서 성경 공부를 하고 돌아오지 않겠나?”
훔쳐온 개를 때려가며 배우는 수의학 공부도, 고된 자취 생활도, 쓸쓸한 마음도 치유 받을 길 없던 내게 선교사의 얘기는 희망의 빛과도 같았다. 패전 직후 일본인이 미국으로 유학을 간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일본은 미국의 적성국가였기 때문이다. 외교관 정도만 정부의 허가를 받아 겨우 출국할 수 있었다.
예외가 있었다. 선교사가 추천하면 엄밀한 심사를 거쳐 유학할 수 있었다. 뒤에 얘기하겠지만 어머니의 미국 유학도 이와 비슷한 사례다.
선교사의 권유에 따라 1954년 항구도시 고베에서 미국행 화물선에 올랐다. 쥐가 다니는 화물선은 지저분하기 그지없었지만 들뜬 마음 때문이었던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지금의 북한 화물선 같지 않을까 생각되는 배였다.
배는 태평양을 느린 속도로 건넜다. 장장 40여 일이 걸렸다. 그것도 캐나다 밴쿠버까지였다. 그곳에서 다시 버스를 이용해 캐나다 국경을 넘어 드디어 선교사가 알려준 켄터키 성서대학(사우스이스턴크리스천대학의 전신)에 도착했다. 어찌 보면 무모하리만치 세상 물정을 모르는 도전이었다.
유학 생활은 마치 김오남이 도쿄에서 겪던 고통처럼 어려움의 연속이었다.
공부를 시작하고 첫 수요일이었다. 학교에서 마을까지 20분을 걸어 교회에 출석했다. 그 교회 장로라는 분이 내게 물었다.
“어느 나라 사람인가?”
“저는 일본인입니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는 내 멱살을 잡았다.
“일본놈이라고? 나가! 여기는 네가 올 자리가 아니야! 지옥이나 가라!”
눈물이 쏙 빠지게 하는 혹독한 차별이었다. 진주만 기습과 그 뒤 이어진 태평양전쟁으로 인한 반일 감정은 시골 교회에 까지 미쳐 있었다.
‘아, 내 친구 김오남이 바로 이 같은 수모를 당하고, 내 소학교 조선인 친구들이 이 같은 모멸을 당했구나….’
이러한 인종 차별은 유학 기간 내내 계속됐다. 일본의 조선인이 ‘조센진’이라고 차별받은 것처럼 나는 ‘자프(jap)’라는 놀림을 받아야 했다. <계속>
작가 전정희
저서로 ‘예수로 산 한국의 인물들’ ‘한국의 성읍교회’ ‘아름다운 교회길’(이상 홍성사), ‘아름다운 전원교회’(크리스토), ‘TV에 반하다’(그린비) 등이 있다. 공저로 ‘민족주의자의 죽음’(학민사), ‘일본의 힘 교육에서 나온다’(청한)가 있다.
전정희 기자 jhje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