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착취 100년사 ‘공주들’ “불편하다고요? 그래서 드러내요”

입력 2020-06-09 14:53 수정 2020-06-09 15:12
끊임없이 되풀이 된 성착취 역사를 파고드는 연극 '공주들'의 한 장면. 극단 신세계 제공


최근 전 국민을 분노하게 한 ‘n번방’ 사건이 급작스레 터진 돌발 범죄였을까. 이 연극은 단호하게 “아니다”고 답한다. 지난해에는 버닝썬 사건이, 더 거슬러 올라가면 1970~80년대 기생 관광이, 더 멀게는 일본군·한국군·미군 위안부가 있었다. 고로 ‘n번방’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 폭력적 성착취 역사의 편린이다.

이 연극은 극단 신세계의 ‘공주(孔主)들2020’. 9일부터 14일까지 서울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에서 선보이는 ‘공주들’은 1900년대부터 현재까지의 성착취 100년의 역사를 주인공 ‘김공주’를 통해 읽어낸 작품이다. 극은 가족 생계를 위해, 또 국가의 전체주의적 동원으로 희생됐던 공주들을 통해 질문을 던진다. 성구매를 해온 사람들은 누구인지, 또 성구매를 하게 한 이들은 누구인지.

2018년 연극실험실 혜화동 1번지에서 초연된 극은 이번이 삼연이다. 시작은 2018년 연극계에 들불처럼 번진 ‘미투 운동’이었다. 김수정 연출가는 9일 국민일보와 전화 인터뷰에서 “미투 운동이 시작된 후 곰곰이 생각해보다 나도 같은 피해를 보았던 미투 운동의 당사자였다는 걸 알았다”며 “그때 내 안에 내재한 어떤 ‘모순’을 느꼈다. 모순의 기원을 쫓다 가부장제 역사 속에서 이뤄진 100년간의 성착취 역사를 살펴보게 됐다”고 설명했다.


9일부터 연극 '공주들2020'을 선보이는 연출가 김수정. 극단 신세계 제공


초연 후 작품성을 인정받은 ‘공주들’은 지난해 ‘제40회 서울연극제’ 공식선정작으로 재연돼 우수상·관객평가단 인기상·신인연기자상 등을 거머쥐었다. 연극을 본 관객들은 김 연출가에게 “나 자신을 마주 보고 있는 듯했다” “내가 왜 이렇게 사는지 연극을 보며 알게 됐다. 용기를 얻었다”는 등의 소감을 건넸다. 김 연출가는 “불편한 내용도 있지만, 사안을 있는 그대로 무대에 드러내려 한다. 성매매 등 성착취가 끊임없이 재현되는 것은 불편한 문제들을 계속 외면해온 결과이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무대 수위도 상당한 편이다. ‘공주들’에서 극장은 주인공 김공주의 몸을 상징하는 공간으로 활용된다. 3개로 난 문은 각각 김공주의 입과 성기, 항문을 상징한다. 이 문을 드나드는 배우·관객이 곧 김공주의 삶을 침범하는 이들의 은유가 된다. 올해는 무대의 알레고리를 더욱 강화했다. 김 연출가는 “이번 무대에는 전구가 더 많이 설치됐다”며 “밝음과 어두움의 조율을 통해 김공주의 몸에서 빚어지는 전성기와 쇠퇴기의 변화를 표현하려 했다”고 설명했다.

올해 ‘공주들’은 “피해 당사자 증언집과 관련 취재진들을 자문으로 선임해” 내용을 확장했다. 버마에서 일본군 위안부 생활을 한 문옥주씨,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순악씨, 미군 위안부에서 여성 운동가가 된 김연자씨, 미군 위안부 피해자 김정자씨의 증언 등이 작품의 뼈대가 됐다. 극은 무대에 오르는 배우 12명과 제작진이 함께 장면을 만들어나가는 공동 창작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특히 올해는 ‘n번방’ 사건도 포함됐다. 배우·제작진은 또 최근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와 정의기억연대(정의연) 사이에 빚어진 갈등에 대한 올바른 시선을 극에 녹이려 오랜 토론을 거쳤다. 김 연출가는 “이용수 할머니의 의견에 귀 기울여야 하지만, 동시에 정의연의 30년 역사도 헛되지 않았다고 본다”며 “등장인물에 대한 개인적 감정을 배제하고, 두 입장 모두를 들어보는 방향의 극이 된 것 같다”고 설명했다.

올해 4월에는 일본 도쿄의 스토어하우스에서도 극을 올릴 예정이었으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잠정 연기됐다. 김 연출가는 “일본 공연에서는 일본군 위안부 등을 다룬 장면이 새로 삽입될 예정이었다”며 “‘공주들’을 시대를 반영하는 작품으로 만들어나가고 싶다. 성착취 구조를 드러내고, 나아가 당사자에게 피해자라는 정체성을 각인하는 것에 대해 성찰하는 작품이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13세 이상, 135분.

강경루 기자 ro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