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9일 낮 12시부터 남북 간 모든 통신연락선을 완전히 차단·폐기하고 대남사업의 방향도 ‘대적 사업’인 적대시 전략으로 전환하겠다고 선언한 것과 관련해 여권 인사들이 입을 모아 ‘우리(남측) 잘못’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남측이 먼저 판문점선언을 어겼고, 이로 인해 북한의 불만이 폭발했다는 것이다. 다만 북한 측이 먼저 남북 합의를 위반했는데, 여권 인사들이 우리 측의 잘못만 언급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북한은 지난달 3일 중부전선 비무장지대(DMZ) 한국군 감시초소(GP)에 총격을 가했다. GP 근무자가 수발의 총성을 듣고 주변을 확인한 결과 GP 외벽에서 4발의 탄흔과 탄두 등이 발견됐다. 우리 군의 인원과 장비 피해는 없는 것으로 파악됐다.
당시 우리 군은 대응 매뉴얼에 따라 10여발씩 2회에 걸쳐 경고사격을 한 뒤 사격 중단을 촉구하는 내용의 경고 방송을 했다. 이어 군은 남북 장성급 군사회담 남측 수석대표 명의로 대북 전통문을 보내 상황이 확대되지 않도록 북측의 설명을 요구했지만 북측은 답신하지 않았다.
북한의 GP 도발은 9·19 남북군사분야 합의서 1조 4항·5항, 4·27 판문점 선언 2조1항과 3조1항, 평양공동선언 1조를 위반한 것이다. 9·19 군사합의 1조4항은 ‘쌍방은 지상과 해상, 공중을 비롯한 모든 공간에서 어떠한 경우에도 우발적인 무력충돌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대책을 취하기로 했다’고 규정하고 있다. 1조5항에는 ‘쌍방은 우발적 충돌이 발생하지 않도록 상시 연락체계를 가동하며, 비정상적인 상황이 발생하는 경우 즉시 통보하는 등 모든 군사적 문제를 평화적으로 협의해 해결한다’고 명시돼 있다.
판문점선언 2조1항에는 ‘남과 북은 모든 공간에서 군사적 긴장과 충돌의 근원으로 되는 상대방에 대한 일체의 적대행위를 전면 중지한다’, 3조1항에는 ‘남과 북은 그 어떤 형태의 무력도 서로 사용하지 않을 데 대한 불가침 합의를 재확인하고 엄격히 준수해 나가기로 했다’고 규정하고 있다. 합동참모본부도 GP 총격사건이 9·19 군사합의 위반임을 인정했다.
상황이 이런데도 일부 여권 인사들은 북한의 연락선 차단이 전적으로 우리의 잘못이라고 일관하고 있다.
정세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은 9일 KBS 라디오 인터뷰에서 “핵심은 2018년 4.27 판문점 선언과 9.19 평양선언, 그다음 군사분야합의를 우리가 솔직히 말해서 성실히 이행하지 않는 데 대한 불만이 그동안 쭉 쌓여 있다가 이번에 삐라 사건으로 촉발이 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특히 비무장지대에서 확성기 방송. 그다음에 전단 살포 등 군사적 긴장과 충돌의 근원으로 되는 도발적 행위는 중지한다는 약속을 했고 북측 요구를 들어주기로 했지만 지키지 않았다”고 했다.
문재인정부 청와대 국정상황실장을 지낸 윤건영 더불어민주당 의원도 “남북정상간 있었던 합의사항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것에 따른 북측의 누적된 불만 같다”고 분석했다. 이어 “정확하게 확성기 방송과 전단지 살포를 더 이상 하지 않겠다. 양쪽에 남과 북의 정상들이 합의한 사항에 대해서 북측이 보기에는 제대로 안 지켜지고 있다는 것”이라며 “(판문점선언) 2조 1항에 있다. 대한민국 정부가 그거 하나 해결하지 못하냐는 인식을 갖고 있는 걸로 보여진다”고 설명했다.
박원순 서울시장도 가세했다. 박 시장은 BBS 라디오 ‘박경수의 아침저널’ 인터뷰에서 “전단 살포를 막는 것이 바람직한가”라는 질문에 “남북관계 진전을 위해서라면 그런 행태(전단 살포)는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답했다. 이어 “북한 인권 문제 지적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지만 지금 이 판에 전단을 살포한다면 북한 정권 당국 입장에서 좋아할 리가 있겠나”라며 “남북관계 평화라는 더 큰 것을 해칠 수 있다”고 말했다.
다만 정 부의장과 윤 의원, 박 시장은 2018년 이후 수차례 이어진 북한의 도발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여권 인사들이 북한이 아닌 우리 쪽에 책임을 두는 것을 두고 청와대와 정부의 난감함이 반영된 것 아니냐는 분석도 나온다. 2018년 세 차례 남북 정상회담을 포함한 남북 관계 개선 성과가 무색해지는 걸 피하기 위해 우리 쪽에 책임을 지우고 있다는 것이다. 야권 관계자는 “국익을 위해선 분명 대북전단 살포를 멈춰야겠지만 모든 책임을 삐라에 넘기는 것은 비겁한 일”이라며 “남북 관계에 있어 북한에 시종일관 끌려다니는 정부가 이번 기회를 통해 스스로 돌아봐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박세환 기자 foryo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