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리그에도 ‘인종차별 반대’ 확산…‘정치 중립’ 규정은?

입력 2020-06-08 18:22 수정 2020-06-08 23:49
전북 현대 공격수 이동국(왼쪽)이 6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하나원큐 K리그1 2020 5라운드 FC 서울과의 경기에서 득점한 뒤 동료 한교원과 무릎꿇기 세리머니를 하고 있다. 한국프로축구연맹 제공

지난 6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하나원큐 K리그1 2020 5라운드 전북 현대와 FC 서울의 경기. 1대 2로 원정팀 전북이 앞선 상황에서 K리그 현역 최고참 공격수 이동국(40)이 오른 측면에서 동료 한교원의 헤딩 패스를 가슴으로 트래핑 한 뒤 공중에 떠오른 공을 오른발로 가볍게 서울 골문에 차넣었다. 상대의 추격 의지를 꺾는 추가골이었다.

공이 골망으로 들어가는 걸 확인한 이동국은 한교원과 시선을 마주쳤다. 뭔가를 약속한듯한 눈치였다. 둘은 골문 오른쪽으로 달려가 오른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골을 축하하기 위해 따라온 팀 동료 김민혁 역시 따라서 무릎을 꿇었다. 4년 전 미국 프로미식축구 쿼터백 콜린 캐퍼닉이 인종차별 하는 도널드 트럼프 정권에 불복종을 선언하며 취했던 그 자세였다.

이튿날 성남종합운동장. 대구 FC 공격수 에드가가 프리킥 상황에서 수비진보다 한참 높게 뛰어올라 통렬한 헤딩슛을 상대팀 성남 FC 골망에 집어넣었다. 세징야가 보내준 먼거리 프리킥도 정교했지만 골문 오른쪽 상단에 꽂힌 에드가의 헤딩도 정확하고 역동적이었다. 잔디 위 한켠으로 동료들과 함께 달려간 에드가는 왼쪽 무릎을 잔디에 딛으며 취재진을 바라봤다.

미국 사회에서 한창 이슈가 되고 있는 조지 플루이드 사망 사건과 관련해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축구선수들의 메시지가 터져나오고 있다. 재개된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제이든 산초, 마르쿠스 튀랑 등 골을 넣은 선수들이 잇따라 세리머니로 시위 지지의사를 밝혔다. 주말 동안 진행된 K리그 5라운드에서도 선수들이 무릎꿇기 세리머니로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메시지를 보냈다.
독일 분데스리가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공격수 제이든 산초가 지난달 31일 SC 파데르보른과의 경기에서 득점한 뒤 인종차별 진압 희생자 조지 플루이드를 기리는 메시지를 티셔츠에 적어 세리머니를 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세계 보편의 스포츠인 축구에서 정치적 메시지는 민감한 문제다. 골 세리머니의 특성 상 선수의 메시지가 어느 종목보다 주목받기 좋을 뿐 아니라 선수를 통제하는 게 사실상 어렵기 때문이다. 비단 과거 국가대표팀에서 논란이 됐던 ‘오노 세리머니’나 ‘독도 세리머니’ 뿐만이 아니다. 과거 2005년 이탈리아 세리에A에서는 SS 라치오의 골잡이 파올로 디카니오가 나치식 경례로 골 세리머니를 했다가 여름 이적시장에서 방출당한 적이 있다.

한국프로축구연맹과 대한축구협회(KFA)는 정관에 정치적 중립 의무를 명시하고 있다. 국제축구연맹(FIFA)의 정관을 받아들인 결과다. 아시아축구연맹(AFC) 정관 역시 마찬가지다. 축구가 국제정치의 세 다툼이나 정파적 싸움에 휘말렸던 20세기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다. 실제 독일 분데스리가에서는 선수들의 인종차별 반대 세리머니 이후 리그 사무국이 징계 여부를 검토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다만 K리그에서는 이번 무릎꿇기 세리머니에 정치적 중립 규정이 적용되지 않을 전망이다. 해당 세리머니가 인종차별 반대라는 세계 보편적 가치에 부합하는 것으로 해석했다는 설명이다. 연맹 관계자는 “내부적으로 이번 건에 대해서 의미를 해석하고 논의를 거쳤다”면서 “인종차별 반대 등 세계 보편적으로 이슈가 되는 정당한 가치에 해당해 규정 적용대상이 아닌 것으로 잠정적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연맹의 설명은 지난 2일 FIFA가 내놓은 대외 메시지의 맥락과도 일치한다. FIFA는 당시 발표한 성명에서 “조지 플루이드 사건 조명과 관련해 많은 축구선수들의 깊은 슬픔과 걱정을 이해한다“며 “대회 개최 측은 관련 맥락과 상식에 기반해 규정을 적용해야 한다”고 밝혔다. 지아니 인판티노 FIFA 회장도 “분데스리가 선수들의 행동은 징계가 아닌 박수를 받아야 마땅하다”고 성명 말미에 직접 메시지를 덧붙였다. 이후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 재개를 앞둔 잉글랜드 축구협회(FA)도 비슷한 입장을 밝혔다.

K리그에서는 여태까지 선수들이 정치적 메시지를 이번처럼 직접 표출한 사례가 드물다. 리그 최고참으로서 발언권이 있는 이동국이 솔선수범해 먼저 표현에 나선 것도 같은 맥락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 연맹이 정치적 중립 위반 규정을 적용한 건 지난해 황교안 당시 자유한국당 대표가 경남 FC 홈구장인 창원 축구센터에 난입해 유세를 했던 사례가 유일하다. 연맹 관계자는 “규정 적용 여부는 각 사례 별로 살펴볼 수밖에 없다. 세리머니의 형태나 의미 맥락 등을 함께 살펴야 한다”고 설명했다.

조효석 기자 promen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