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인 사망 시위, 새 구호로 떠오른 “경찰예산 끊어라”

입력 2020-06-08 17:32
'흑인 목숨은 소중하다' 옆에 등장한 '경찰 예산 지원 끊어라' 문구. AP연합뉴스

“경찰 예산 끊어라(Defund the police)”가 “흑인의 목숨도 중요하다(Black Lives Matter·BLM)”에 이어 미국 흑인 사망 항의 시위의 핵심 구호로 떠올랐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이 구호를 극좌파의 ‘경찰 폐지’ 운동으로 규정하며 시위대에 역공을 펼쳤다.

워싱턴포스트(WP)는 7일(현지시간)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가 백인 경찰관의 과잉 제압으로 숨진 뒤 미국 내에서 경찰 예산을 삭감하거나 경찰 조직을 해체한 후 재정비하려는 움직임이 급증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경찰의 인종차별적 법집행에 대한 항의가 경찰이 지닌 과도한 공권력을 비판하는 근본적 문제제기로 확대된 것이다.

워싱턴DC 백악관 인근 라파예트 광장 앞 대로에는 전날 밤 노란색 페인트로 ‘경찰 예산 끊어라’ 문구가 새겨졌다. 시민단체 ‘BLM DC’ 소속 활동가들이 주도한 작업으로, BLM 문구가 이 도로에 들어선 지 하루만에 바로 옆 3m 거리를 두고 또 다른 대형 문구가 더해진 것이다.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는 “시위대는 정치인들의 경찰개혁 약속이 충분치 않다고 주장하기 위해 이 문구를 새겨넣었다”고 설명했다.

현재 미국 경찰의 1년 예산은 1000억 달러(약 120조원)에 육박한다. 뉴욕시 경찰 예산안만 놓고봐도 60억 달러(약 7조2000억원)로 웬만한 국가 예산 규모다. 하지만 천문학적인 예산에 비해 경찰 서비스는 형편없다는 비판이 이전부터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꾸준히 제기돼 왔다.

특히 플로이드 사망 사건에 볼 수 있듯 흑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경찰을 공공안전의 수호자가 아닌 지역사회의 위협자로 보는 시각이 팽배하다. CNN은 8일 미 법무부 데이터를 인용해 미국 경찰의 폭력적 업무행태가 다른 선진국들에 비해 심각하다고 전했다. 데이터에 따르면 지난 2015년 6월부터 2016년 3월까지 미국 경찰의 체포 과정에서 숨진 사람은 1348명으로 추정된다. 비슷한 기간 영국에서는 경찰 체포 과정에서 13명이 목숨을 잃었다.

일부 지방정부는 경찰개혁 요구에 화답하고 있다. 플로이드 사망 사건이 발생한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 시 의원 13명 중 9명은 이날 성명을 통해 “시 경찰청 해체와 경찰 예산 지원 중단·삭감을 추진하겠다”며 “우리 공동체를 실질적으로 지켜줄 새로운 공공 안전 모델을 재건하는 데 전념할 것”이라고 밝혔다. 시 의원 9명은 폐지에 반대하는 제이컵 프레이 시장의 거부권을 무력화할 수 있는 규모다.

빌 더블라지오 뉴욕시장도 “뉴욕 경찰 예산을 삭감해 이중 일부를 청년 서비스와 사회복지로 돌리겠다”고 밝혔다. 앞서 에릭 가세티 로스엔젤레스(LA) 시장도 최대 1억5000만 달러의 경찰 예산을 삭감하겠다는 입장을 발표한 바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경찰 예산 지원 중단 움직임을 법과 질서에 대한 도전으로 규정하고 반격을 시도했다. 그는 이날 트위터를 통해 “졸린 조 바이든과 극단적 좌파 민주당 인사들은 경찰 예산 지원을 끊어버리길 원한다”며 “나는 훌륭하고 충분한 재원을 지원받는 법 집행을 원한다. 나는 법과 질서를 원한다”고 강조했다.

AP통신은 민주당 인사들이 범죄에 미온적이라는 프레임을 덧씌우기 위해 트럼프가 시위대의 구호를 악용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엘릭스 비탈레 브루클린대 사회학 교수는 시위대 구호와 관련해 NPR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누군가 스위치를 누르면 경찰이 사라지는 상황을 만들자는 게 아니라 사회적으로 경찰의 역할을 다시 정비하자는 얘기”라고 설명했다.

이형민 기자, 워싱턴=하윤해 특파원 gilel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