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그였으니 한국에서 전위미술이 언제 시작됐을까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일은 예정된 수순인지 모르겠다. 전위야말로 해묵은 전통을 부수고 새로운 미래를 열어젖히는 예술가의 실천이기 때문이다. 제18회 에르메스재단 미술상을 받은 전 작가가 수상 기념전으로 ‘새로운 상점’전을 서울 강남구 도산대로 아틀리에 에르메스에서 하고 있다. 이번 전시는 바로 그런 질문에 대해 답을 보여주고자 하는 노력으로 보인다.
작가를 사로잡은 것은 한국에서 근대 아방가르드의 표상인 시인이자 건축가 이상(1910∼1927)이다. 구체적으로 1932년에 이상이라는 필명으로 처음 발표한 연작시 ‘건축무한육면각체’ 중 하나인 동명의 시다. 시를 보자.
‘사각형의내부의사각형의내부의사각형의내부의사각형의내부의사각형…위에서내려오고밑에서올라가고위에서내려오고밑에서올라간사람은밑에서올라가지아니한위에서내려오지아니한밑에서올라가지아니한위에서내려오지아니한사람.’
이 수수께끼 같은 시는 당시 경성에 출현한 ‘미츠코시 백화점’에서 모티브를 얻었다.
작가는 이상의 시가 암시하는 새로운 상점의 이미지를 수직과 수평, 아치 형태로 적절히 구성된, 공사장 비계 같은 구조물로 시각화했다. 아치 안으로 쑥 들어서면 관람객은 자연스레 근대에 새롭게 등장한 아케이드를 산책하는 기분이 들게끔 동선이 짜여 있다. 가로축은 진열장을 연상시키고, 실제로 이번에 새롭게 만든 조각 작품을 올려놓은 진열대 구실도 한다. 영상을 걸어놓은 가벽 구실도 한다.
‘새로운 상점’은 뭘 의미하는가. 최근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이렇게 설명했다.
“상점은 1930년대에 새롭게 생겨난 근대적 상업 공간인 백화점을 상징한다. 백화점은 일본 자본이 일본에 있는 백화점을 모방해 경성에 만든 것이다. 일본의 백화점은 또 세계 최초의 백화점인 파리의 봉 마르쉐 백화점을 모방했다. 모조의 모조가 우리의 식민지 근대였다. 그런 시대적인 특성이 함축된 것이 백화점이다.”
이상은 식민지 자본주의에 갇힌 자신을 여러 겹의 조롱 안의 무력한 카나리아로 비유하면서 그 소름 끼치는 현실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에 대해 ‘꾿빠이’ 작별 인사를 고할 뿐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시에서 토로한다.
처음 바닥에서 천장까지 쳐진 수직의 빽빽한 구조물을 보고 얼핏 감옥의 창살 같다는 첫인상을 받은 것은 어쩌면 작가의 의도대로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근대가 근대로 끝나면 의미가 없다. 전소정은 식민지 근대인 이상이 느꼈던 무력감에서 탈주해 2020년 현재의 시점의 현실적 모순을 직시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이상이 근대의 느낌을 사각형의 변주를 통해 표현한 것처럼, 사각형의 형태를 띤 다양한 예술 장르를 변주했다. 사각형으로 상점을 시각화하기도 했지만, 사각형의 개념은 확장이 돼 책이 됐고, 영상의 스크린이 됐다.
우선 책을 보자. ‘ㅁ’이라는 제목이 붙은 책에는 음악가, 건축가, 미술가 등 국내외 11명의 필자가 이상의 시가 가지는 현재적 의미에 대해 쓴 글이 실렸다. 전소정 작가도 ‘도해된 로봇’이라는 제목으로 필자로 참여했다. 이 글은 ‘절망하고 탄생하라’라는 영상 작품에 대한 소개이기도 하다.
25분 길이의 영상작품 ‘절망하고 탄생하라’는 서울, 도쿄, 파리의 빌딩과 지하철, 공원과 뒷골목을 오가고, 현재와 과거를 넘나들고, 직접 찍은 영상뿐 아니라 다큐멘터리와 영화의 자료 화면이 함께 몽타주처럼 섞여 자본주의를 우의적으로 비판한다. 이를테면 서울이 나오는 장면에선 인왕산 바위를 판매하는 성우의 목소리가 나온다. 자본주의에 포획된 사회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없는가. 영상 속에는 건물과 건물 사이를 훌쩍훌쩍 뛰어다니는 파쿠르가 등장한다. 이동기술을 뜻하는 파쿠르는 운동할 시간도 돈도 갖지 못한 유럽 내 하류층 이민자들이 도시 장애물을 이용해 운동하면서 시작됐다고 한다. 건물 사이를 수직으로 이동하는 파쿠르의 걷기 방식은 근대 이후 전통이 된 원근법적 관점, 즉 수평적 걷기에 균열을 일으키는 도전이다. 그래서 파쿠르는 아방가르드적인 작업으로 전통에 균열을 내고자 하는 작가의 분신으로도 보인다.
전소정은 서울대 조소과를 졸업하고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서 미디어아트를 전공하며 현재 박사과정에 있다. 7월 5일까지.
손영옥 미술·문화재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