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미술 의사 생활?…미술품 복원사 C의 하루

입력 2020-06-04 16:14
오래 된 영화 ‘냉정과 열정’에는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유화 복원사가 되기 위해 수련 중인 일본인 청년이 나온다. 복원의 재미에 푹 빠진 그를 두고 일본의 저명한 화가인 할아버지는 아쉬움 섞인 목소리로 이렇게 말한다. “그렇다면 넌 화가가 되기는 힘들겠구나.”

이렇듯 누군가에게는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화가 보다 무대 뒤에서 죽어가는 그림을 수복하는 복원사로 사는 게 더 심장 떨리는 일이다. 미술품 수복 행위는 의사가 된 기분으로 중병 든 미술작품의 생명을 살리는 일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미술품 복원사의 세계를 보여주는 전시가 열리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청주관이 마련한 ‘보존과학자 C의 하루’전. 미술품의 수집, 전시, 보존·복원으로 이어지는 미술관의 역할 가운데 청주관은 보존·복원에 특화한 분관으로 2018년 개관했다. 1969년 국립현대미술관이 설립된 이후 1980년 4월 소장품 수가 400여점에 이르자 이들 작품의 보존 대책을 위해 1980년 양화 수복실이 마련된 게 그 출발이다. 그러니 청주관의 정체성을 홍보하는 전시라고 할 수 있다.
이갑경의 〈격자무늬의 옷을 입은 여인〉( 1937년 작)에 대한 보존과정을 담은 영상.

전시는 ‘보존과학자 C’라는 가상 인물을 등장시켜 보존과학의 모든 것을 소개하는 방식을 취한다. ‘C'는 복원사를 뜻하는 영어 컨서베이터(Conservator)의 이니셜에서 땄다. 보존과학자의 하루를 상처, 도구, 시간, 고민, 생각 등의 몇 가지 키워드로 풀어낸다.
오지호의 '풍경'(1927년 작).

하이라이트는 버려질 지경에 처했던 미술품이 복원사의 ‘치료’를 통해 새 생명을 얻는 과정을 보여주는 ‘상처와 마주한 C' 코너다. 뚱뚱이 여성 조각으로 유명한 니키 드 생팔(1930∼2002)의 조각 작품 ‘검은 나나’(1967년 작), 한국적 인상주의 화가 오지호(1905∼1982)의 ‘풍경’(1927년 작), 서양화가 이갑경(1914∼미상)의 ‘격자무늬의 옷을 입은 여인’(1937년) 등 완전히 보존처리가 끝난 작품 그 자체만 본다면 여느 미술관 전시나 다를 바 없다. 복원 과정을 영상과 관련 자료를 전시함으로써 치료 전의 ‘상처’를 드러내기에 흥미롭다.
오지호 작 '풍경'의 X선 사진. 처음에 이 캔버스에 누드화를 그렸음을 알 수 있다.

복원 과정에선 뜻밖의 발견도 이뤄진다. 오지호의 ‘풍경’은 X선을 투과한 결과 캔버스의 밑바탕에 누드화가 보였다. 화가는 처음 그렸던 누드를 지우고 백칠을 한 다음 이 풍경을 다시 그렸음을 알 수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오지호의 유일한 누드화를 소장하고 있다. 지워진 누드화는 화가에겐 구겨서 버린 초고 같은 셈이다.

‘검은 나나’는 얼룩덜룩 남은 원래의 칠을 벗기고 전체 도장을 다시 하는 과감한 복원을 했다. 다. 이 과정에서 색상 선택 등과 관련해 재단 측과 협의를 하는 과정을 영상을 통해 볼 수 있다.

복원사의 도구도 궁금하다. 복원을 위해서는 안료 분석이 중요하다. 안료 500여종의 데이터베이스가 구축돼 있다. 안료 분석을 위해 첨단 기기인 XRF를 지난해 5억원에 구입하기도 했다. XRF는 선을 작품에 비춘 뒤 물감에 포함된 원소의 종류와 양을 알아내는 기계이다.
XRF기기가 X선을 투과시켜 안료를 분석하는 모습.

재료의 차이도 볼 수 있다. 치자, 쪽, 도토리 껍질 등 전통 염료를 각각 종이와 비단에 염색했을 때 색상의 차이를 견본품을 통해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다. 조각 작품의 경우는 석재, 목재, 합성수지, 청동 등 재질에 따라 느낌이 어떻게 다른지도 보여준다.
국립현대미술관 청주관에서 일하는 보존과학자의 방.

복원은 또 철학이 필요한 문제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 설치된 백남준의 비디오아트 작품 ‘다다익선’(1988)은 원래 사용됐던 브라운관 TV가 더 이상 생산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지금 대량생산되는 LCD TV로 교체해야 하는 것인가, 힘들더라도 브라운관 TV를 구해야 하는가. 복원 원칙을 둘러싼 고민을 우종덕 작가는 영상으로 풀어냈다. 이처럼 현대미술 작품이 더해짐으로써 전시가 풍요로워졌다. 전시장 입구에 구비된 흰 가운을 입고 복원사가 된 기분으로 전시를 관람할 수 있다. 10월 4일까지.

손영옥 미술·문화재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