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바닥 다큐소설] 청계천 빈민의 성자(23): “조센진에게 임대 줄 수 없다”

입력 2020-06-03 09:10
註: 예수와 같은 헌신적 삶을 살고자 1970년대 서울 청계천 빈민들과 함께한 노무라 모토유키 목사(노 선생)와 빈민운동가 제정구 등이 겪은 ‘가난의 시대’. 그들의 삶을 통해 복음의 본질과 인류 보편적 가치 그리고 한국 교회의 민낯을 들여다볼 수 있는 다큐 소설이다. 국민일보 홈페이지 ‘미션라이프’를 통해 연재물을 볼 수 있다.

6.25한국전쟁 당시 노 선생과 그의 친구 김오남(유학생)이 도색 아르바이트를 했던 도쿄 명치학원대학 채플실. 명치학원대학 홈페이지 사진.

도쿄에서 대학 생활하면서 조선인 친구 한 명과 깊은 우정을 나눴다. 전라도 출신으로 기억되는 김오남(前 제주대 교수)이라는 친구였다. 그는 해방 직후 수의축산대학으로 유학 온 유학생이었다. 김오남은 마음이 참 깊었다. 나보다 두어 살 많았다.

김오남은 한국 유학생도 없는 학교생활을 힘들어했다. 붙임성이 있다 해도 일본 학생들이 곁을 주는 일이 드물어 유학 생활이 쉽지 않았다. 조선은 해방이 되었지만, 일본 사람들에겐 여전히 ‘조센진’이라는 편견이 있었다.

그런데도 소학교 시절 조선인 친구들에 대한 기억 때문인지 김오남과 쉽게 친구가 될 수 있었다.

1950년 6월 25일. 도쿄에 조선 전쟁(한국전쟁) 발발 호외가 뿌려졌다. 해방 직후 남북으로 갈리더니 남북한이 전쟁에 돌입한 것이다. 전쟁 발발 소식이 알려진 며칠 뒤 김오남이 풀이 죽어 나타났다. 불안한 얼굴이었다.

“식민지에서 벗어나 나라의 기틀도 제대로 잡지 못했는데, 저렇게 갈라져 전쟁까지 하다니…. 너무 슬프다.”

김오남은 당장 일본에서 살아갈 일이 막막했다. 고향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확인할 길도 없었다. 모든 통신 수단이 끊겼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송금도 끊겨 먹고 잘 곳도 없었다.

“나와 같이 지내자. 둘이 벌어서 생활하면 되지 않겠니. 걱정하지 마라. 너희 부모님과 가족도 무사할 거고, 전쟁도 빨리 끝날 거야”

나는 김오남을 위로했다. 그리고 이튿날부터 아르바이트 자리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다행히 알고 지내는 선교사를 통해 메이지가쿠인대학(명치학원대학)으로부터 잡일 아르바이트 자리를 얻었다. 내가 메이지가쿠인대학 부설고 출신이었기에 가능했다. 우리는 뛸 듯이 기뻤다.

일본의 유명한 미션스쿨인 메이지가쿠인대학은 미국 선교사 제임스 커티스 헵번(1815~1911)이 1863년 세웠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일본에 들어온 제임스 헵번은 처음엔 부인과 함께 영어 의숙으로 출발했다. 지금은 150년 전통의 학교가 됐다.

김오남과 나는 이 학교 예배당 건물의 흰 벽면에 페인트칠하는 아르바이트를 했다. 예전(禮典)에 사용되는 널따란 강대상을 미국제 모피 청소 기구를 사용해 말끔하게 닦아내는 일을 했다.

일본 도쿄 명치학원대학 채플실 내부. 6.25 당시 노 선생과 유학생 김오남(前 제주대, 전남대 교수)이 도색 및 강대상 청소 등의 아르바이트를 했던 곳이다. 명치학원대학 홈페이지 사진.

어느 날 김오남이 신세 한탄을 했다.
“방을 구하러 여기저기 뛰어다녔지만 구할 수가 없어. 내가 조선인이라고 아무도 임대하지 않는군.”
여간 마음이 아프지 않았다. 국적이 다르다고 유학생에게조차 임대를 하지 않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당분간 방을 얻을 때까지 우리 집에서 같이 지내세. 좀 불편은 하겠지만 참아보세. 송금조차 받을 수 없는 형편이니 한 푼이라도 아껴야지.”

김오남은 눈물을 참느라 입술을 깨물었다. 나라가 저 지경인 것도 서러운데 이국 멀리에서 오죽 외로웠을까 싶었다. 우리의 생활은 날로 팍팍해졌다. 물질은 항상 부족했고, 내면은 공허했다.

도대체 인생이란 무엇인가 하는 시간만 늘었다. <계속>

작가 전정희
저서로 ‘예수로 산 한국의 인물들’ ‘한국의 성읍교회’ ‘아름다운 교회길’(이상 홍성사), ‘아름다운 전원교회’(크리스토), ‘TV에 반하다’(그린비) 등이 있다. 공저로 ‘민족주의자의 죽음’(학민사), ‘일본의 힘 교육에서 나온다’(청한)가 있다.

전정희 기자 jhje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