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단녀·유리천장·싱글맘… ‘굿캐스팅’의 페미니즘

입력 2020-06-03 05:00

“힘센 사람(남자)들이 해결해주는 게 아니라 여자들이 직접 싸워요. 여자들이 싸우고 울고 이기고 하니까 시청자가 대리만족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원 없이 소리 지르고 싸우고 욕했어요(웃음).” SBS 월화드라마 ‘굿캐스팅’ 제작발표회에서 주인공 백찬미를 연기한 배우 최강희의 말이다. ‘굿캐스팅’은 국정원 주요 보직에서 밀려난 여성들이 현장 요원으로 차출된 후 위장 잠입 작전을 펼치는 액션 코미디 드라마다. 첫 방송부터 지상파 월화극 시청률 1위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화려한 액션이 가미된 ‘굿캐스팅’은 여성 배우 3인이 이끈다. 최강희는 전설의 ‘블랙 요원’이었으나 작전 수행 중 부하직원을 잃고 현장 업무에서 배제된 백찬미를 연기했다. 최강희는 데뷔 25년 만에 액션 연기에 도전했는데 아주 센 신고식을 치렀다. 지금까지 드라마에서 여성들의 싸움은 물을 뿌리거나 뺨을 때리거나 머리끄덩이를 잡는 식이었지만 ‘굿캐스팅’의 액션 강도는 다르다. 도복을 입고 상대를 엎어 치는가 하면 정자세로 총을 발사하거나 좁은 공간에서 마주한 덩치 좋은 사내를 단숨에 드러눕힌다.

백찬미는 기지가 뛰어나고 발 빠르고 무서운 게 없는 최정예 요원이지만 어째서인지 승진은 더디다. 팀 단위로 움직이는 업무에서 작전 실패의 책임을 혼자 짊어지지만 굴하지 않는다. 단단한 유리천장을 깨부수고 제자리를 찾는 과정엔 오롯이 백찬미 혼자였다. 국정원은 위계가 강하고 남성 연대가 짙은 ‘남성적’ 조직문화다. 그래서 백찬미가 아무리 뛰어난들 남자들을 통솔하는 직책까지는 감히 갈 수 없었다. 그는 반전을 위해 잠시 조직의 중심에서 물러나 교도소로 향했고 일부러 독방살이를 자처하면서 중요한 단서를 손에 쥐었다. 백찬미가 해낼 무수한 일은 어떤 변화를 불러올까.


젊은 시절 국정원의 핵심 임무를 도맡았던 황미순(김지영)은 경력 단절 여성이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육아를 하면서 주요 보직에서 멀어진 지 오래다. 동기인 동관수(이종혁)가 팀장 자리까지 승승장구하는 동안 그는 1200원짜리 영수증에 목숨 거는 잡무 요원으로 전락했다. 국정원은 수시로 그에게 권고 퇴직을 압박했지만 굴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살아남아 아이 학원비라도 벌어야 했으니까. 아이를 낳았고, 늙었고, 힘 빠진 호랑이에게 영수증을 처리하는 일이라도 주어진 것이 어딘가 싶었다. 더는 현장에 나설 일은 없을 거라 철석같이 믿었던 그에게 다시 현장 잠입 임무가 주어졌다. 관절염으로 걷기도 힘들다며 손사래 치던 그는 집으로 돌아와 베란다 은밀한 곳을 뒤졌다. 숨겨뒀던 권총을 꺼내 들며 사격 자체를 취하는 그의 표정에서 묘한 설렘을 본 듯하다.

임예은(유인영)은 아빠 없이 아이를 키우는 ‘싱글맘’을 대변한다. 돈을 벌면서 아이까지 돌봐야 하는 노동의 무게가 시청자를 지그시 눌렀다. 아빠는 아이가 태어나는 날 죽었고 출산 순간 그는 가장이 됐다. 20대에 싱글맘이 된 그가 자진해서 현장이 아닌 데스크만 전전한 이유는 아이를 위해서다. 남편의 목숨을 앗아간 위험한 현장에서 최대한 멀어져야 했으니까. 그래서인지 임예은은 국정원에서 가장 뛰어난 해킹 실력을 갖추고도 상사 앞에만 서면 작아졌고 늘 주눅 들어 눈치를 봤다. 아침 일찍 출근하라는 지시가 떨어지면 혼자 집에 남을 아이를 떠올렸고, 일이 쏟아져 아이와 키즈카페에 가지 못할 때면 가슴을 쳤다.

그런 그가 회사에서 지원해주는 집에서 쫓겨날 위기에 놓이자 현장 잠입을 불사한다. 현장 경험이 전혀 없는 ‘화이트 요원’이었고 겁이 많고 소심하며 심지어 총은 잡아본 적도 없다. 무모한 도전을 시작한 건 딸의 보금자리를 지키기 위한 엄마의 분투이기도 했지만 사실 접어둔 꿈을 향한 아드레날린 때문일지도 모른다. 임예은은 점차 삶의 중심을 잡아가며 자기 주도적 인물로 변모한다. 사건 해결의 중심에는 늘 그가 있다. 최근 화에서 임예은은 비밀장부의 진짜 비밀을 알아내면서 괴한 실체를 파헤치는 데 성공했다. 그의 성장은 모든 싱글맘을 향하는 “할 수 있다”는 메시지가 아닐까.

박민지 기자 pm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