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에 이어 ‘흑인 시위’로 곤경에 처한 틈을 이용해 중국의 대미 공세가 강화되고 있다.
중국이 남중국해 방공식별구역(ADIZ) 선포를 저울질하고 있다는 보도에 이어 미국 농산물 구매 중단을 지시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중국은 앞서 미국 항공모함들이 코로나 감염 탓에 운항을 중단하자 보란 듯이 랴오닝함을 대만 부근에 보내 무력시위를 하는 등 미국을 계속 자극하고 있다. 미국의 ‘흑인 시위’에 대해서도 트럼프 행정부에 집중 포화를 퍼붓고 있다.
이는 적이 멈추면 교란하고(敵駐我擾), 적이 피로하면 공격한다(敵疲我打)는 마오쩌둥의 전술을 떠올리게 한다.
블룸버그 통신은 1일(현시시간) 중국 정부 관리들이 국영 농산물 업체에 미국산 농산물 수입을 중단하라고 지시함에 따라 최대 곡물 회사인 중량그룹(COFCO)과 중국비축양곡관리공사(시노그레인) 등 주요 국영 농산물업체가 미국산 대두 구매작업을 중단했다고 소식통을 인용해 보도했다. 또 이미 체결한 미국산 돼지고기 수입 계약도 취소했다고 소식통은 전했다.
지난 1월 15일 양국이 합의한 1단계 무역합의에 따라 중국은 향후 2년간 농산물과 공산품, 서비스, 에너지 등 분야에서 2017년과 비교해 2000억 달러 규모의 미국산 제품을 추가로 구매하기로 했다. 보도 사실이라면 1단계 무역 합의가 결국 ‘파기’로 가는 수순으로 볼 수도 있다.
이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중국의 홍콩 국가보안법 법제화에 대응해 홍콩의 특별 지위 박탈 절차를 시작하라고 지시하자 ‘반격’하는 차원의 조치로 해석된다. 소식통은 미국산 농산물 수입 중단 조치는 향후 미국의 움직임에 따라 확대될 수도 있다고 전했다.
중국의 농산물 수입중단 조치는 오는 11월 미국 대선을 앞두고 트럼프 대통령의 텃밭인 팜벨트(미 중서부 농업지대) 지역 민심을 겨냥한 것으로 풀이된다. 트럼프 대통령에게 직접 타격을 주겠다는 것이다.
중국은 또 10년 전부터 영유권 분쟁지역인 남중국해의 방공식별구역(ADIZ) 계획을 구상해왔으며, 선포 시기를 저울질하고 있다는 보도도 나왔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익명의 중국군 관계자를 인용해 “제안된 방공식별구역은 (영유권 분쟁 해역인) 프라타스 군도(둥사군도), 파라셀 군도(시사군도·베트남명 호앙사군도), 스프래틀리 제도(난사군도·베트남명 쯔엉사군도)를 포함한다”고 전했다.
미국이 지난달 28일 ‘항행의 자유’를 내세워 파라셀 군도에 함정을 보내는 등 미·중 군사 갈등이 고조되는 시점에 방공식별구역 선포 계획이 제기돼 주목된다. ‘익명의 소식통’으로 전해진 미국산 농산물 수입 중단 및 방공식별구역 보도는 중국 측이 미국의 반응을 떠보려는 의도가 섞여 있다는 해석도 나온다.
평소라면 대적하기 힘든 미국이 코로나19에 이어 전국에 들불처럼 일어나는 흑인 시위로 궁지에 몰려있을 때 반격을 하면서 마오쩌둥의 16자 전법을 미·중 관계에 적용하고 있는 셈이다.
마오쩌둥이 막강한 국민당 군대와 싸우기 위해 창안한 ‘16자 전법’은 적이 공격하면 후퇴하고(敵進我退) 적이 멈추면 교란한다(敵駐我擾), 적이 피로하면 공격하고(敵疲我打) 적이 후퇴하면 추격한다(敵退我追)는 것이다.
중국은 앞서 코로나사태가 한창이던 지난 4월 18일 남중국해에 행정구역 시사구와 난사구를 신설한다고 발표하는 등 코로나19 등으로 각국이 혼란한 틈을 이용해 남중국해 영유권 굳히기를 시도하고 있다.
남중국해 ADIZ 선포 계획과 행정구역 신설은 미국 뿐아니라 동남아시아 국가들과 첨예한 갈등을 불러 일으키는 사안이지만 미국이 국내 문제로 곤경에 빠진 상황을 이용해 적극 공격에 나서는 모양새다.
중국은 지난 4월 중순 미국 태평양에 배치한 항공모함들이 코로나19로 발이 묶인 사이 랴오닝함을 동원해 대만 일대에서 해상 훈련을 실시하기도 했다.
중국 항공모함 랴오닝함과 미사일 구축함 등으로 이뤄진 중국 해군 군함 6척이 대만과 일본 사이의 미야코 해협을 통과한 뒤 대만을 시계 방향으로 돌며 항해를 이어갔다.
미군이 태평양에 배치한 루스벨트함과 로널드 레이건함, 니미츠함, 칼 빈슨함 등 4척의 항공모함이 모두 코로나로 발이 묶이자 보란 듯이 무력시위를 한 것이다.
관영 환구시보는 “미국 해군이 전염병으로 어려움을 겪는 가운데 중국 해군은 먼바다로 군함을 보내 방역에 대한 자신감을 보여줬다”며 랴오닝함 훈련은 ‘근육’을 보여준 것이라고 주장했다.
중국 관영 매체들은 흑인 시위에 대해서도 “아름다운 광경” “퓰리처상 감”이라는 식으로 조롱섞인 비판을 하는 등 연일 공세를 펼치고 있다.
글로벌타임스는 2일 “미국 시위는 ‘국가의 파탄’을 드러냈다”면서 “미국의 해묵은 사회적 문제점이 노출됐다”고 지적했다.
신문은 “인종 불평등과 차별, 사회 양극화 등 미국의 오랜 문제가 도널드 트럼프 정부 들어 더욱 증폭됐다”며 트럼프 대통령에게 ‘인종차별주의자 대통령’이라는 꼬리표를 붙였다.
자오리젠 중국 외교부 대변인도 전날 브리핑에서 인종차별은 미국 사회의 고질병이며 현 시위는 이 문제를 반영한 것이라고 말했다.
화춘잉 대변인은 자신의 트위터 계정에 “숨을 쉴 수 없다”라고 썼다. 지난달 25일 미니애폴리스에서 백인 경찰에게 목을 눌려 숨진 흑인 조지 플로이드가 죽기 전에 경찰에 호소했던 말이다.
관영 글로벌타임스 후시진 편집장은 31일 칼럼에서 “이제 ‘아름다운 광경’이 홍콩에서 미국으로 확산하고 있다”며 “미국 정치인들은 이 광경을 자신이 집 창문으로 직접 즐길 수 있게 됐다”고 조롱했다.
베이징=노석철 특파원 schr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