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권이 한명숙 전 총리 수뢰 사건에 대한 논란에 불을 지피면서 당시 재판 과정이 석연찮았다고 드는 근거 중 하나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가 만든 내부 문건의 내용이다. 행정처가 숙원사업이던 상고법원 도입을 위해 김무성 당시 새누리당 대표에 대한 공략 방안을 언급하면서 ‘(한 전 총리 사건이) 대법원에서 전부 무죄 취지로 파기될 경우 설득이 사실상 어려울 것으로 예상’이라고 적은 게 대표적이다.
그러나 한 전 총리의 확정판결 이후 만들어진 행정처의 대외비 문건 등에는 재판 거래 정황보다는 상고법원 도입을 위해 한 전 총리 사건을 이용해 여야 모두를 설득하려는 계획이 주로 담겼다. 오히려 한 전 총리 사건처럼 사회적 이목을 끄는 사건을 제대로 처리하려면 상고심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는 게 당시 행정처의 논리였다.
행정처는 2015년 8월 24일 ‘한명숙 사건 대법원 판결 이후 정국 전망과 대응 전략’이라는 대외비 보고서를 만들었다. 한 전 총리의 확정판결이 같은 달 20일 나오고 4일 뒤 생산된 문건이다.
문건에는 한 전 총리 사건이 상고법원 도입에 장애물이 될 것을 우려했던 행정처 내부 분위기가 잘 담겨 있다. 행정처로서는 상고법원 입법을 위해 여야 모두의 지원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한 전 총리 판결로 당시 새정치민주연합(현 더불어민주당)의 비협조 분위기가 짙어지자 행정처는 대응책 마련에 골몰해야 했다.
행정처는 새정치민주연합의 향후 대응에 대해 ‘사법부 압박 카드로 상고법원에 대한 부정적 입장을 피력할 것으로 예상됨’이라며 우려를 표했다. 한 전 총리 사건의 성격에 대해서는 “제도권 기성 정치인의 부패와 관련된 사안”이라며 “친노(親盧)들 만의 잔치로 끝날 위험이 매우 크다”고 분석했다.
대응 원칙은 “법과 원칙에 따른 독립적 판결 결과이고 상고법원 등 대법원 추진 정책과 별개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행정처는 “야당의 비난은 여론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며 “저자세보다 기존 입장을 고수하되 법원에 우호적인 야당 중진의원 설득에 적극적으로 임해야 한다”고 진단했다. 당시 강력 반발하던 전해철·박범계 의원과는 냉각기를 갖고, 온도차가 있는 이상민·우윤근·이춘석 의원을 접촉해 관계복원 노력을 해야 한다는 ‘투 트랙’ 전략이었다.
행정처는 ‘야당 봐주기에 따른 늑장 판결’이라는 새누리당 비판에도 답을 내놔야 했다. 그에 대해서는 “상고사건 폭주로 인한 대법원 과부하 때문”이라며 “대법원이 사회적 이목을 끄는 사건을 신중하고 신속하게 처리하려면 상고심 제도를 개선해야 하고 가장 현실적인 대안은 상고법원”이라는 대응 논리를 제시했다.
문건에는 당시 제기됐던 재판 거래 의혹에 대한 대응책도 담겼다. 행정처는 “피고인이 유력 정치인인 점을 제외하면 정치적 해석 여지가 없다”며 “상고법원 도입을 위해 새누리당 협조를 이끌어 내기 위한 판결이라는 정치적 해석은 불가능하다고 강조해야 한다”고 적었다.
구자창 기자 critic@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