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을 갈망하는 인간이 만들어낸 관념캐(관념캐릭터·추상적 개념을 캐릭터화한 것)는 대부분 악역이었다. 주체 의식을 잃을 위기에 놓인 주인공은 ‘또 다른 나’와 대척했고 결국 한 쪽의 비극으로 마무리되곤 했다. 뮤지컬 ‘차미’의 차별성은 여기서 나왔다. 분명 관념캐가 존재하는데 그마저도 선(善)했다. 무대에는 4명이 등장하는데 서로에게는 격려를, 관객에게는 위로를 건넸다.
지난달 29일 서울 중구의 한 카페에서 뮤지컬 ‘차미’를 총괄한 이지나 프로듀서와 차미호 역을 맡은 배우 함연지를 만났다. 이 프로듀서는 “유쾌한 분위기의 ‘차미’의 반전이라면 미호보다 더 착한 관념캐인 차미가 튀어나온다는 점”이라며 “선한 미호가 창조한 관념캐가 악할 리 없지 않나. 무대에 선 모두가 착한 공연”이라고 설명했다.
뮤지컬 ‘차미’는 평범하지만 완벽한 나를 꿈꾸는 차미호의 이야기다. 집에만 틀어박혀 있던 미호의 고민은 딱 하나. 저 사람처럼 살면 어떨까. 완벽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 질문에서 뮤지컬 ‘차미’가 시작됐다. 미호의 성격은 소심했고 친구도 많지 않았다. 그렇게 SNS에 빠졌다. 그곳에서는 ‘하트’가 쏟아졌다. 더 많은 관심을 받고 싶어서, 더 큰 인기를 끌고 싶어서 미호는 급기야 다른 사람의 사진을 훔친다. 마치 SNS 속 인물이 미호 자신인 것처럼. 그러던 어느 날, 미호의 눈앞에 차미가 나타났다. 그가 SNS로 만든 가상의 인물이다. 실존하지 않지만 사실 차미는 미호다. 차미는 미호의 닫힌 마음을 어루만지며 그의 인생을 바꾸는 여정을 시작한다.
한국 뮤지컬 분야 대모로 불리는 이 프로듀서는 지금까지 수많은 공연을 무대에 올려왔지만 관람할 때마다 눈물이 나는 공연은 처음이라고 했다. 그에게도 참 이상한 경험이었다. 유쾌하고 발랄한 힐링 코미디극인데, 그 안에 짠함이 있었다.
“지금까지 공연을 만들면서 여러 영웅을 등장시켰지만 사실 현실에는 그런 존재가 없잖아요. 하지만 ‘차미’는 달라요. 주변에 있을 법한 일상의 영웅들이 나오죠. 이들에게는 세상을 바꾸는 힘이 있어요. 그게 제가 ‘차미’를 사랑하는 이유예요.”
뮤지컬 ‘차미’는 2016년 우란문화재단에서 개발돼 2017년 트라이아웃 공연을 선보였고 2년에 걸친 스토리와 무대 업그레이드로 지난해 두번째 트라이아웃을 성공리에 끝마쳤다. 지금 공연은 2020년 버전으로 한층 트렌디해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스토리는 풍부해졌고 유쾌한 멜로디는 귀에 단단히 스민다. 6인극에서 4인극으로 인물 관계를 좁히면서 얼개를 촘촘히 다졌고 한결 가벼워진 몸집으로 수출과 지방 공연도 노리고 있다.
차미호 역을 맡은 함연지는 뮤지컬 ‘차미’ 만큼이나 사랑스러웠다. 뮤지컬 넘버를 흥얼거리며 “정말 좋지 않냐”고 웃어 보이던 그는 관객이 공연을 본 후 새로운 미래를 꿈꿀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의기소침한 미호를 차미가 보듬어 주는 장면에서 사회에서 정한 기준에 꼭 들어맞게 살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알 수 있었어요. 인생에서 필요한 건 스스로 채울 수 있어요. 내 안의 상상력과 창의력을 동원해 미래를 하나씩 하나씩 그려가는 시간이 된다면 좋겠어요.”
함연지는 뮤지컬 ‘차미’는 현장에서 봐야 감동이 배가될 것이라 자신했다. 현장감이 더해지면 극이 던지는 맑은 위로가 더 깊숙이 들어갈 수 있다는 확신에서다. 함연지는 “관객과 가깝게 호흡하는 작품”이라며 “배우와 눈을 마주치면서 선율이 가득한 경쾌한 현장을 마음껏 즐겨주길 바란다”고 전했다. 이 프로듀서도 “배우 스스로 조율할 수 있는 영역을 넓혔다”며 “즉흥 애드리브 등 현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요소가 특히 ‘차미’에 더 많다”고 말했다.
이들은 뮤지컬 ‘차미’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로 침체한 사회에서 잠시나마 아무 생각 없이 웃을 수 있는 공연이 될 거라 자부했다. 가볍지만 무겁고, 유쾌하면서 잠시 숨 고르게 해주는 뮤지컬 ‘차미’. 이날 공연을 몇 시간 앞둔 함연지가 말했다.
“무대에 오르기 전이면 늘 뭉클해요. 누군가는 우리의 공연을 보러 와주시는 구나. 더 열심히 해야겠다. 그런 생각이 들어서요. 마스크를 끼고 있지만 눈은 보이잖아요. 정말 감사하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어요. 뮤지컬 ‘차미’가 모두에게 위안이 됐으면 좋겠어요.”
박민지 기자 pm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