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 아버지와 이별 “기억 사라져도 ‘사랑’ 사라지지 않아”

입력 2020-05-31 14:38 수정 2020-05-31 14:52
영화 '조금씩, 천천히 안녕'의 한 장면. 월터미티컴퍼니 제공

영화 '조금씩, 천천히 안녕'의 나카노 료타 감독. 월터미티컴퍼니 제공


이 영화를 보고 궁금해졌다. 말 많고 탈 많은 가족, 그마저도 혼자 살겠다며 뿔뿔이 흩어지는 요즘, 이 감독은 왜 줄곧 ‘가족의 이야기’를 그리는 것일까. 그것도 아주 따스하고, 가슴 먹먹한 가족의 이야기를. 이 질문을 받은 감독은 최근 국민일보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이렇게 답했다. “제게 가족은 구원이자 희망이고, 삶의 의미입니다. 어려운 가족이라도, 절망이 아닌 희망의 씨앗을 품고 있다는 걸 그리는 게 제 역할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이런 소신을 전한 이는 일본의 떠오르는 감독 나카노 료타. 그는 데뷔 후 ‘캡처링 대디’(2013) 등 웰메이드 가족영화를 연이어 선보이며 곧장 스타덤에 올랐다. 특히 상업영화 데뷔작이었던 전작 ‘행복 목욕탕’(2016)은 일본 아카데미상 작품상 등을 석권하고, 국내에서도 제대로 입소문을 탔다. 수채화처럼 은은한 가족 서사로 국내에도 팬층이 탄탄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과 비견되며 ‘포스트(차세대) 히로카즈’라는 애칭도 얻었다.

지난 27일 개봉한 ‘조금씩, 천천히 안녕’은 그런 료타 감독이 약 4년 만에 내놓은 또 하나의 수작이다. 작품 중심에 놓이는 이야기는 치매에 걸린 아버지 쇼헤이(야마자키 쓰토무)와 7년에 걸쳐 이별을 준비하는 가족들의 모습이다. 아내 요코(마쓰바라 지에코)와 큰딸 마리(다케우치 유코), 둘째 딸 후미(아오이 유우)는 명철했던 쇼헤이가 기억을 잃어가는 시간을 함께 보내며 예상치 못했던 위로를 받는다.


영화 '조금씩, 천천히 안녕'의 한 장면. 월터미티컴퍼니 제공


가슴 아픈 소재지만 최루성 신파는 없다. 뭉근하게 스미어오는 따뜻함이 이 영화의 백미다. 치매 환자가 있는 가족은 고단하기만 할 것이라는 선입견을 흔드는 영화인 셈이다. 료타 감독은 “치매로 뇌가 망가지는 부분은 몇 퍼센트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변하지 않는다고 한다”며 “기억은 사라져도 ‘사랑’은 사라지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치매 환자를 돌보는 것은 괴롭고 힘들다는 이미지가 있는데, 실은 병간호를 하는 사람이 환자로부터 때로 위로를 얻는다는 점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영화의 원작은 일본 국민 작가 중 한 명인 나카지마 교코의 소설 ‘긴 이별’이다. 지금까지 작품에서 오리지널 각본을 고집해왔던 료타 감독에게는 새로운 도전이기도 했다. 원작의 매력과 감독의 개인적 경험이 동력이 됐다. 료타 감독은 “할머니께서 치매를 앓으셨던 터라 마음이 더 움직였던 것 같다”며 “원작은 아버지의 치매를 다루고 있으면서도, 가족의 사랑스럽고 익살스러운 모습을 담아낸다. 내가 영화를 통해 그리고자 했던 세계가 바로 이 소설에 있었다”고 전했다.

대신 원작을 조금 더 간결하고 매력적으로 전하기 위해 세 자매를 두 자매로, 세 명의 손자를 한 명으로 다듬었다. 푸드코디네이터였던 원작의 후미도 푸드트럭을 운영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캐릭터가 더 풍성하고 사랑스럽게 느껴지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영화는 원작과는 또 다른 묵직한 감동을 전한다.

길게 느껴질 수 있는 128분의 러닝타임이 훌쩍 지나간다. 7년 전의 이야기부터 시간 순행적으로 서사를 풀어가며 몰입을 돕는다. 일본 대표 배우들의 호연도 매력적이다. 료타 감독은 이번 캐스팅이 “운명적”이라고 했다. 그는 “아버지 역의 야마자키씨는 캐스팅 이전부터 원작이 영화화된다면 본인이 제안을 받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고 한다”며 “아오이씨(후미 역)와 다케우치(마리 역)씨, 마쓰바라씨(요코 역)는 현장에서 부모와 자식이라기보다 세 자매 같았다. 야마자키씨를 중심으로 한 그런 서정적인 분위기가 영화에 잘 녹아든 것 같다”고 평했다.


영화 '조금씩, 천천히 안녕'의 한 장면. 월터미티컴퍼니 제공


료타 감독이 꿈꾸는 감독으로서의 방점은 ‘가족’을 넘어 ‘엔터테인먼트(즐거움)’에 찍혀있었다. 그는 “앞으로도 영화의 베이스가 ‘가족’일지 모르겠지만, 시대적 문제를 포함한 현재에 집중하는 영화, 즐거움을 전하는 작품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세계가 신음하는 최근 코로나19 소재의 영화를 만들어보고 싶다고 생각하는 건 이 때문이다.

한일관계가 경색된 상황에서 영화와 같은 문화 콘텐츠의 지속적 교류가 관계의 새 물꼬를 터줄 것이라고도 믿고 있다. 이창동 감독의 ‘밀양’, 정재은 감독의 ‘고양이를 부탁해’ 등 한국 영화 애호가로도 잘 알려진 료타 감독은 “나라와 언어, 역사의 벽을 넘어 이해의 지반을 마련해주는 게 엔터테인먼트 콘텐츠의 중요한 역할인 것 같다”고 말했다.

강경루 기자 ro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