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칼 만지작 ‘느낌 와?’ 묻던 상사… 대법 “1심 애교 판단은 잘못”

입력 2020-05-31 12:46

상사가 신입 여성사원의 머리카락을 만지며 “느낌이 오냐”고 묻거나 성행위를 암시하는 손동작을 하는 등의 행동을 한 것은 직장 내 지위를 이용한 추행으로 볼 수 있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하급심은 “애교스러운 행동”이라거나 “위계질서가 강한 조직이 아니었다”는 등의 이유로 무죄를 선고했지만, 대법원은 “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추행에 관한 법리를 오해했다”며 달리 판단했다.

대법원 3부(주심 노태악 대법관)는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위반(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추행) 혐의로 기소된 A씨(40)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서부지법으로 파기환송했다고 31일 밝혔다.

A씨는 2016년 10~11월 20대 중반의 신입사원 B씨의 머리카락을 만지면서 “여기를 만져도 느낌이 오냐”고 말하거나, 뒤에서 어깨를 두드린 뒤 자신을 쳐다보면 혀로 입술을 핥고 “앙, 앙”이라고 소리 내는 등의 부적절한 행동을 했다. B씨의 화장에 대해 “볼이 발그레, 부끄한 게 마음에 든다. 오늘 왜 이렇게 촉촉하냐”고 하거나 손가락으로 성행위를 암시하는 동작도 했다. A씨는 B씨가 반발하자 일을 떠넘기거나 야근을 시키고 업무 정보를 알려주지 않으면서 골탕 먹이기도 했다. B씨는 1년 만에 사직서를 내고 회사를 떠났다.

검찰은 직장 내 상급자였던 A씨가 업무상 위력을 행사해 B씨를 추행한 혐의로 기소했지만 1·2심은 무죄로 판단했다. 피해자의 성적 자유의사를 위력으로 제압한 상태에서 추행한 것으로 볼 정도는 아니라는 이유였다.

1심은 B씨가 싫다고 직접 말하거나 비슷한 방식으로 맞대응한 점 등을 이유로 “B씨가 A씨에게 의사를 표현하는데 심리적 두려움이나 위축감을 가졌던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고 판단했다. 특히 머리카락을 만지는 등의 행위에 대해 “애교스러운 행동”이라며 “불쾌감을 느꼈겠지만 성적 자유를 침해하는 행위는 아니다”고 판시했다. 2심도 “(해당 회사가) 위계질서가 강한 조직이 아니었고, B씨가 A씨의 목에 낙서를 하는 등 장난을 치기도 했다”며 1심과 같이 무죄를 선고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추행에서 ‘위력’은 현실적으로 피해자의 자유의사가 제압될 것을 요하는 것은 아니다”며 위력의 범위를 넓게 해석했다. 대법원은 “B씨는 모멸감과 성적 수치심을 느껴 수면을 제대로 취하지 못했다”며 “병원에서 우울증 진단을 받고 약을 처방받아 복용하기도 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일반인 입장에서도 도덕적 비난을 넘어 추행으로 평가할 만하다”며 “원심은 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추행의 법리를 오해한 잘못이 있다”고 판시했다.

구자창 기자 critic@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