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은 곧되 겉은 완곡하면 비록 곧더라도 해를 입지 않을 것이다’. 장자의 말이다.
걷는 자는 굽은 길을 쉼 없이 돈다. 걸을수록 존재는 작아질 것이요 그럴수록 자신에 대한 인식은 맑아질 것이다. 그렇게 속은 곧아질 것이다.
신간 ‘걷는 자의 기쁨’(Mindcube 刊)은 굽은 길을 끊임없이 걷는 자가 느끼는 성찰적 기쁨이다. 내딛는 발걸음이 더 해질수록 기쁨을 느낀다는 것은 성찰의 힘이기도 하다.
박성기 도보여행자 만큼 우리 산하 구석구석을 내딛는 이를 찾는 건 쉽지 않다. 등산가도, 오지탐험가도 아닌 그가 영험한 자연의 속살을 조심스럽게 밟아가며 우리의 궤적을 열어나가고 있다. 풀 한 포기조차 조심스럽게 밟는 발걸음으로 말이다.
그 궤적은 전근대와 근대 그리고 개발이라는 핑계로 소비하고 버려진 삶의 길에 온기를 불어넣는 일이다. 퇴계 선생이 청량산에 올라 학소대로 돌아나가던 중 낙동강 물길을 보며 “그림으로 들어가는 길”이라고 했듯(124쪽) “천지간에 오로지 나만이 존재하는 고요함을 느낀다”(279쪽 인제 자작나무 숲길 편)는 자연에 대한 헌사에서 저자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그가 그렇게 내디딘 굽은 길은 35코스다. ‘코스’라는 표현이 갖는 목적성은 속되며 자본주의적 냄새가 난다. 저자의 생각대로라면 ‘서른다섯 굽잇길’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사계(四季)의 풍경으로 구분해 산하의 아름다움과 삶의 기쁨을 얘기한다.
이즈음 저자는 ‘봄날은 간다’의 애절함이 배어 있는 충북 영동 양산팔경 둘레길을 권한다. 대송호 관광지에서 여의정, 봉곡교, 강선대, 함벽정, 봉양정, 비봉산전망대, 봉황대, 수두교, 송호관광지로 이어지는 시오리(6㎞)는 금강 상류의 시린 물결이 같이 한다.‘실개천 건너 강변을 따라 붉은 봄의 절창을 지나다’(64쪽) 라고 했다.
경북 울진 십이령 길은 여름의 실내악 같은 곳이다. 숲은 오직 녹색의 소박한 무대로 인공적 백 노이즈를 차단했다. 있는 듯 없는 듯, 보이는 듯 보이지 않는 듯한 연주자들이 들고 난다. ‘오늘 밤은 수많은 별을 벗 삼아 쉬어가리라’(144쪽)라고 말한다.
가을의 바다에서 가을의 정취를 느끼기란 쉽지 않다. 늘 바다는 적멸이 없다. 소멸하지 않는 생은 다시 태어나지 못한다. 가을이라는 시공간에서 적멸의 이별을 경험하지 못한다면 가을이 아니다. 저자는 가을 바다에서 적멸의 아름다움을 자근자근 안내한다.
그 적멸 길은 충남 보령 신두리 해안사구 길이다. 신두리사구센터, 순비기언덕, 곰솔생태숲, 고라니동산, 모래언덕으로 이어지는 십 리 남짓한 길. 바다와 사구와 억새군락…그리고 그 쓸쓸함과 애잔함을 기쁨으로 바꿔 놓는 붉은 해당화꽃이다. 소멸이 끝이 아니고 시작임을 암시한다.
겨울 인천 소래길은 도회의 일상과 안식을 알려준다. 녹슨 양철지붕과 시간의 늙음을 알려주는 뻘의 무게는 황량함이 주는 미학이다. 인천대공원, 습지원, 장수천, 남동교, 만수물재생센터, 소래습지생태공원, 소래포구, 소래역사관으로 이어지는 이십오릿길. “오래된 기억을 끌어내는 겨울동화 길”(384쪽)이라고 적었다.
저자는 지역별 주요 추천지로 전남 해남 달마고도, 충북 영동 월류봉 둘레길, 강원 속초 장사항~고성 삼포항, 인천 옹진군 영흥도, 경기 포천 한탄강, 경남 밀양 아리랑고개, 전북 군산 시간여행 길 등을 꼽았다.
전정희 기자 jhje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