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내가 경험한 차별은 이것만이 아니다. 태평양전쟁이 깊어지면서 의식주가 점점 힘들어졌다. 교복마저도 완제품을 생산해 낼 수 없을 만큼 상황이 악화했다. 정부에서는 궁여지책으로 값싼 교복 천을 우리에게 나눠주었다. 박 군 등 조선인에겐 그 교복 천도 지급되지 않았다. 그 장면을 지금도 뚜렷이 기억하는 거로 보아 충격적이었던 일임이 분명하다.
박 군 등과 나는 1~6학년까지 같이 다니다 졸업했으나 그 이후로는 함께 다니지 못했다. 조선인에게 중등학교 진학은 꿈같은 일이었다. 또 우리가 진학하는 교토 부립중학교는 조선 학생 입학이 아예 금지되어 있기도 했다.
그리고 정확히 기억나지 않으나 그 두 친구 중 한 명이 1945년 일본 패망 후 도쿄 번화가 신주쿠로 가서 신문팔이를 하고 있다고 들었다. 내가 소학교 졸업 후에 그 두 조선인 친구를 본 적이 없다.
그들의 인생은 그 후로 어찌 되었을까? 기도를 하다 두 친구를 떠올리며 늘 하나님의 품 안에서 행복하길 기도했다. 이제 그들도 나처럼 할아버지가 되어 있을 것이다.
내가 조선인을 이해하게 된 또 하나의 배경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우리 살림이 궁핍해졌기 때문이다. 어머니를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할아버지 때문에 여동생을 포함한 우리 식구는 이시진 빈민가에서 살아야 했다.
어머니에게 “도시락 싸주세요”라는 말을 꺼낼 수 없을 정도로 먹고살기가 힘들었다. 전쟁이 한창이었으니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그러니 식민지 백성으로 살아가는 조선인 노동자들이야 이시진의 매춘부, 노동자보다 더 천대받았다. <계속>
작가 전정희
저서로 ‘예수로 산 한국의 인물들’ ‘한국의 성읍교회’ ‘아름다운 교회길’(이상 홍성사), ‘아름다운 전원교회’(크리스토), ‘TV에 반하다’(그린비) 등이 있다. 공저로 ‘민족주의자의 죽음’(학민사), ‘일본의 힘 교육에서 나온다’(청한)가 있다.
전정희 기자 jhje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