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초반 월드스타로 불렸던 가수 겸 배우 비(정지훈·38)가 때아닌 신드롬의 주인공이 됐다. 2017년 발매했던 ‘깡’에서 시작됐는데, 대한민국 내로라하는 댄스 가수로 입지를 다졌던 그의 커리어에서 가장 혹평이 쏟아졌던 곡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흑역사로 남을 뻔했던 곡이 최근 영화, 드라마, 앨범 모두 흥행이 부진했던 그에게 제2의 전성기를 선사한 셈이다.
시작은 지난해 11월이었다. 유튜브 ‘호박전시현’에 20초가량의 ‘1일 1깡 여고생의 깡(Rain-Gang) cover’ 영상이 올라왔다. 깡 뮤직비디오를 패러디한 이 영상은 200만뷰 이상을 기록하면서 폭발적 반응을 얻었다. 이후 2분27초 분량의 풀 버전이 공개되면서 깡 신드롬이 시작됐다. ‘한 번도 안 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본 적 없다’는 말이 돌더니 급기야 ‘1일 1깡’이 유행처럼 번졌다. 하루에 깡 뮤직비디오를 한 번씩은 봐야 한다는 의미다. 패러디 영상은 봇물 터지듯 쏟아졌다. 뮤직비디오는 지난 23일 1000만뷰를 돌파했다.
처음에는 희화화에 가까웠다. 가사는 이렇다. ‘Yeah, 다시 돌아왔지. 내 이름 레인(RAIN). 스웩을 뽐내 WHOO! They call it! 왕의 귀환 후배들 바빠지는 중! (…) 허세와는 거리가 멀어. 난 꽤 많은 걸 가졌지. 수많은 영화제 관계자 날 못 잡아 안달이 나셨지’. 가사와는 다르게 노래에는 허세가 가득했고 퍼포먼스는 과장됐다. 대중은 ‘영화, 드라마, 음반 모두 쫄딱 망한 비의 허세’ 또는 ‘최신 트렌드를 따라가지 못하는 옛날 춤’이라며 비아냥거렸다. 그러다 네티즌은 ‘깡 중독’에 빠졌다. 깡 챌린지, 깡 리액션 등을 업로드하며 커뮤니티에서 함께 즐기기 시작했다. 신드롬이 번질수록 대중에게 비는 친근하게 다가왔다.
조롱으로 시작돼 어느덧 문화가 된 깡 신드롬에 반전이 시작된 것은 뜻밖에도 통계청 때문이다. 통계청 공식계정은 이런 분위기를 제대로 읽지 못하고 깡 뮤직비디오에 ‘통계청에서 깡조사 나왔습니다. 1일 10시 기준 비 ‘깡’ 오피셜 뮤직비디오 조회수 685만9592회, 3만9831UBD 입니다’라는 댓글을 달았다. ‘UBD(엄복동)’란 비가 주연을 맡았던 ‘자전차왕 엄복동’을 비꼬는 신조어인데, 1UBD는 이 영화의 최종 스코어인 17만명을 뜻한다.
대중은 통계청을 향해 공개적으로 비를 조롱했다며 비난을 퍼부었다. 나흘 후 통계청이 ‘국민과 스스럼없이 소통하고자 가수 비 뮤직비디오에 댓글을 쓰면서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지 못한 점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사과했지만 정작 비에 대한 정중한 사과는 없었다며 더 큰 지적이 쏟아졌다.
깡 신드롬이 선망으로 급커브한 결정적 계기는 MBC 예능 ‘놀면 뭐하니’부터다. 김태호 PD는 깡 트렌드를 빠르게 잡아채 열풍에 탑승했다. 비를 캐스팅한 뒤 MC 유재석과 깡 신드롬을 두고 허심탄회한 이야기 장을 만들었다. 처음 유재석은 조심스러워했다. 익명 뒤에 숨은 대중의 조롱 섞인 놀이가 자칫 비에게는 상처였을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미 깔린 판. 김태호 PD는 치밀하게 반전을 꾀했다.
비는 차분하고 의연했다. “그게 뭐 대수냐”는 식으로 심드렁해 하면서 “1일 1깡은 서운하다. 1일 3깡 정도는 해야 하지 않냐”고 응수했다. ‘아침 먹고 깡, 점심 먹고 깡, 저녁 먹고 깡’을 부탁하기도 했다. 오랜 팬이 만들었다는 ‘비 시무 20조’를 비가 받아들이는 명장면도 탄생했다. 비가 습관적으로 하는 퍼포먼스를 꼽으며 ‘꾸러기 표정 금지’ ‘입술 깨물기 금지’ ‘윙크 금지’ ‘2020년 현실을 직시하기’ ‘과거에 머무르지 않기’ ‘자아도취 금지’ ‘프로듀서에 손 떼기’ ‘중간에 박수치면서 리듬타기 금지’ 등을 지적했다. 유재석이 하나씩 읊을 때마다 비는 잠시 고민하는 행동을 취하더니 이내 “노력하겠다”며 쿨하게 받아쳤다. 다만 ‘화려한 조명 그만’ 항목에서는 “포기할 수 없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대중의 조롱은 찬사로 바뀌었다.
이 현상은 밈(MEME)으로 불린다. 온라인상에서 화제가 되는 재미있는 콘텐츠를 맥락 없이 소비하면서 역주행시키는 네티즌의 놀이로 짤, 유행어 등을 통칭한다. 최근 들어 생겨난 새로운 풍경이 아니라 이전부터 있던 문화에 이름을 붙인 것뿐이다. 최근 밈은 장르와 시기에 무관하게 추억 속 콘텐츠를 다시 불러내고 화력을 더하고 있다. 가수 양준일과 배우 김영철, 김응수가 밈을 통해 화제가 된 대표적 인물이다. 약 20년 전의 콘텐츠를 재미있게 가공해 끊임없이 회자하면서 추억 속 인물과 대사, 장면을 끌어올렸다.
다만 전문가들은 이런 유희가 또 다른 악성 댓글의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건전한 문화로 정착하기 위해서는 배려와 예의가 전제돼야 한다는 의미다. 밈의 기저에는 어찌 됐든 희화화가 깔려 있다. 악성 댓글이 상대를 공격하려는 의도라면 밈은 조롱하기 위한 목적이 짙다. 받아들이는 처지에서는 공격과 조롱의 경계가 모호해 상처로 치닫기도 한다. 실제로 가수 김창렬은 ‘창렬스럽다’는 신조어가 밈으로 소비되자 소송을 불사했다. 얼마 전 MBC는 개표방송 도중 ‘언니, 저 마음에 안 들죠?’라는 멘트를 삽입해 뭇매를 맞았다. 이 발언은 2015년 여성 연예인 두 명이 싸우던 중 나온 말로, 주로 여성 간 무의미한 다툼을 희화화하는 표현으로 사용됐다. 이 사건 이후 해당 연예인들은 큰 타격을 입어 방송 활동을 접기도 했다.
한 방송계 관계자는 “밈 트렌드를 방송에 녹이기 위해 제작진도 노력하고 있다”면서도 “다만 무분별한 조롱이 섞인 콘텐츠도 많아 걱정되는 것도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상대가 어떻게 받아들일지를 지금의 네티즌이 고민해보면 좋겠다”며 “몇 개의 사례가 긍정적으로 작용했다고 단순 놀이로 치부하기에는 경계가 모호하다”라고 설명했다.
박민지 기자 pm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