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 각오로 뛴다” 오늘 부천의 첫 ‘연고이전 더비’

입력 2020-05-26 06:00
부천 FC 구단이 26일 제주 유나이티드와의 경기를 맞아 준비한 포스터. 부천 FC 1995 제공

“절대 잊지 않을 그날”

2006년 2월 2일은 K리그2 부천 FC의 팬들에게 문자 그대로 ‘잊기 어려운’ 날이다. 부천 유공 코끼리 시절부터 부천을 연고로 하던 K리그 구단 부천 SK가 제주도로 연고이전을 결정한 날이라서다. 연고이전 뒤 팬들의 노력으로 창단된 부천은 어느덧 K리그2에서도 승격을 넘보는 강호로 자리 잡았다.

부천 팬들에게는 26일 또한 잊을 수 없는 날이 될지 모른다. 이날 부천은 연고이전의 당사자인 제주 유나이티드를 불러들여 하나원큐 K리그2 2020 4라운드 경기를 치른다. 2006년까지 부천 SK가 홈경기장으로 쓰던 부천종합운동장, 바로 그 장소에서다. 연고이전 뒤 무려 5228일 만에 치르는, 부천 구단과 팬으로서는 꿈에도 그리던 경기다.

부천 서포터즈 '헤르메스'의 부천 SK 시절 응원 모습. 출처: 헤르메스 홈페이지

같은 자리, 같은 공간

오랫동안 기다린 경기인만큼 부천은 구단부터 코치진, 선수들까지 준비에 열심이다. 부천 구단 관계자는 25일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올 시즌 처음으로 경기장에 서포터들이 녹음한 응원가가 울릴 수 있도록 음향업체를 섭외해 준비했다”면서 “경기장 외벽에는 현수막을 설치해 팬들이 적은 메시지를 볼 수 있도록 했다”고 말했다. 수화기 너머에서는 리허설 중인 부천의 응원가가 울리고 있었다.

부천 구단은 서포터즈 ‘헤르메스’ 출신인 박찬하 축구 해설위원을 섭외해 인터넷 방송에서 팬들을 위한 중계해설 이벤트를 준비했다. 박찬하 위원은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부천 SK 시절이던 2000년대 초 헤르메스 콜리더(서포터즈 앞에서 구호나 응원가를 선창하는 역할)를 했다”면서 “군 제대 직전 저녁 스포츠뉴스 단신에서 연고이전 소식을 듣고 황당해 했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이외에도 경기에는 흥미로운 요소가 많다. 제주의 수비수 임동혁은 부천에서 성장해 부주장까지 맡았던 부천의 프렌차이즈 스타지만 지난 시즌이 끝나고 제주에 입단하면서 부천 팬들의 원망을 샀다. 최근 활약하고 있는 공격수 공민현 역시 부천에서 기량이 급상승해 성남 FC로 이적, 이후 제주로 건너간 사례다. 제주 남기일 감독과 부천 송선호 감독은 뛴 기간은 겹치지 않지만 둘 모두 부천 SK, 혹은 전신인 부천 유공 코끼리의 ‘레전드’라 부를만한 선수였다.

훈련에 몰두 중인 부천 FC 주장 김영남. 부천 FC 1995 제공

“입단 때부터 부천 역사 들었다…선수들 의욕 넘쳐

부천 선수단은 지난 23일 안산 그리너스와의 원정 경기를 승리로 장식한 뒤 이날도 훈련에 몰두하고 있었다. 현재 부천 선수단은 개막 이래 3경기째 전승 행진을 하고 있다. 녹록한 경기는 없었지만 고비마다 집중력을 발휘하며 승부를 결정지었다. 객관적 전력에서 제주에 열세지만 조심스레 결과를 기대해도 좋을 법한 흐름이다.

주장이자 주전 미드필더 김영남은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준비해왔던 걸 하다 보니 결과가 좋게 나오고 있다. 어느 팀을 만나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선수 모두 갖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는 “3경기 동안 막판에 골을 많이 넣으면서 선수 사이에서도 의욕이 넘친다. 충분히 할 수 있다고 본다”고 덧붙였다. 이어 “언젠가 지금의 좋은 흐름이 끊길 수도 있겠지만 가능하면 한 경기라도 더 이어나가고 싶다”며 “적어도 이번 경기는 꼭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선수들 사이에서도 부천의 역사는 익히 알려진 이야기다. 김영남은 “처음 입단했을 당시 구단에서 부천의 역사에 대해 선수들에게 영상을 보여줬던 기억이 난다”며 “그래서 부천이 그런 역사와 과거가 있고, 아픔이 있는 팀이라는 걸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말했다.

부천 선수단은 경기를 앞두고 24일 구단 인스타그램 계정을 통해 선수들의 각오가 담긴 영상을 내보내기도 했다. 영상에서 선수들은 “선수와 팬 모두 자존심이 걸린 경기”라면서 “100%가 아니라 120%, 150%를 준비하겠다”며 각오를 남겼다.

송선호 부천 FC 감독이 홈구장 부천종합운동장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송 감독은 부천 SK의 전신인 부천 유공 코끼리 출신이다. 부천 FC 1995 제공

송선호 감독 “마음가짐이 승부의 관건”

부천의 사령탑인 송선호 감독은 “경기를 앞두고 선수들에게 팀의 역사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다”면서 “이미 선수들이 선배들에게 서로 이야기를 전해 들은 덕분에 잘 알고 있어 굳이 강조할 필요가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선수들의 마음가짐이 승부의 관건이 될 것”이라면서 “다른 경기도 마찬가지지만 이번 경기는 더욱 하나로 뭉쳐서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부천에 몸담았다가 현재는 제주에서 뛰는 공민현, 임동혁은 송 감독 입장에서는 자신의 가르침으로 열심히 뛰었던 ‘제자’들이다. 송 감독은 “스승의 날마다 전화도 하고 마음을 써주는 선수들이다. 애착이 가는 게 사실”이라면서도 “경기장에서 만나면 그런 배려는 없다. 부천이 이길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지금 부천이 내고 있는 성과는 혹독하기로 유명한 송 감독의 전지훈련에서 선수들이 흘린 땀의 결과이기도 하다. 송 감독은 “선수들이 저를 믿고 많은 땀을 흘렸다”면서 “흘린 땀만큼 꼭 보답을 받도록 잘 보좌하는 게 제 임무다. 이번 경기에서도 그런 결과를 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지난해 K리그2 준플레이오프 진출을 결정짓고 나서 선수단과 서포터즈 헤르메스가 함께 찍은 사진. 부천 FC 1995 제공

“간절한 축구” 보여달라

부천 서포터즈 헤르메스 회원들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때문에 십수 년을 기다려온 이번 경기를 직접 볼 수 없는 상황이다. 아쉬운 마음은 경기장에 미리 설치할 현수막과 응원가로 대신해야 한다. 현수막에는 상대 팀을 향한 분노보다는 부천 선수들을 향한 격려의 메시지를 주로 담기로 했다.

콜리더 정도운씨는 “상대에게 ‘우리가 우리 힘으로 팀을 만들어서 너희를 만났다’는 걸 알려주고 싶다”면서 “이렇게 멋진 팬들을 져버렸다는 걸 후회스럽게 만들어주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중요한 경기에서 함께 할 수 없어서 선수들한테 정말 미안하다”면서 “후회 없이 뛰었다 할만한 경기를 보여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오래간 기다린 경기를 맞아 헤르메스가 부천 선수단에게 바라는 건 ‘간절한 축구’다. 설사 결과를 건지지 못하더라도 단단한 각오로 경기에 임해달라는 당부다. 안영호 헤르메스 대표는 “사실 ‘지면 가만 안 둔다’ 하는 마음은 아니다. 전력상 분명 부천이 한 수 아래지만 절박함, 간절함을 보여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조효석 기자 promen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