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어디 썼는지 알 수가 없다… 비영리단체 깜깜이 회계는 고질병

입력 2020-05-24 17:54 수정 2020-05-24 18:04
지난 20일 오후 정의기억연대 부실회계·안성 쉼터 고가 매입 의혹과 관련 검찰의 압수수색이 진행 중인 서울 마포구 정의기억연대 사무실에서 취재진이 취재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국내 비영리단체들이 기부금 사용 내역을 세무 당국에 불성실하게 보고한 정황이 다수 포착됐다. 정의기억연대(정의연)처럼 기부금 사용내역을 정확히 밝히지 않는 건 일반적이었다. 전문가들은 건강한 기부문화와 시민자치활동 지속을 위해 비영리단체도 투명한 회계관리로 신뢰를 쌓아나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국민일보가 24일까지 최근 일주일 간 국세청 홈택스에 올라온 비영리단체들의 공시 자료를 분석한 결과 정의연처럼 이월 기부금을 누락하거나 지출내역을 모호하게 기재한 단체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350만명의 회원을 둔 사단법인 한국자유총연맹(자유총연맹)은 지난해 기부금 지출 명세서에 1월부터 12월까지 거둬들인 기부금을 모두 사용했다고 공시했다. 예를 들어 1월 수입이 4억8100만원인데, 지출도 4억8100만원인 식이다. 이에 따라 연맹의 기부금 잔액도 매월 같은 금액이었다.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현실적으로 불성실하게 회계를 공시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 한 회계전문가는 “전년도 공시는 매월 수입과 지출 사이 차이가 있었는데, 지난해만 똑같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며 “규모가 훨씬 큰 사회복지공동모금회조차 매월 기부금 전액을 소진하는 경우는 없다”고 했다.

동물권활동단체 카라는 공시된 지출 명세서로 기부금이 어디에 쓰였는지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웠다. 수혜인원도 대부분의 항목에 833명으로 동일하게 기재돼 있었다. ‘동물구조및입양사업 외’로 833명이, ‘정책사업 외’로 833명이 기부금 수혜를 받았다는 식이다. 또 ‘교육사업 외’ ‘회원사업 외’ ‘더봄센터준비사업 외’ 등 다른 항목의 수혜인원도 마찬가지다. 정의연이 수혜인원을 99명, 999명으로 기록했던 것과 유사하다. 몇몇 고유명사에 오타가 발견되는 등 불성실 공시 정황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두 단체는 모두 “외부감사를 받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자유총연맹 관계자는 “우리는 매년 행정안전부의 감사를 받고 있는 단체”라며 “자세한 사항은 회계 담당자의 검토 후 설명하겠다”고 해명했다. 카라 관계자는 “사업 특성상 수혜인원을 특정하기 쉽지 않다”면서 “매년 외부 감사를 받아 투명하게 운영하고 있고, 인원보단 지출 금액을 정확하게 적는 것을 회계 전문가들이 가장 중요하게 보고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외부감사를 받는다고 해서 불성실한 회계 공시 문제가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회계·세무 전문가들에 따르면 비영리단체의 불성실 공시는 이미 관행처럼 굳어져 있는 현상이다. 비영리단체는 운영 여건상 전문 회계 담당자를 따로 두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한 회계 전문가는 “소규모 단체의 어려움은 이해하지만, 이런 관행이 단체가 성장한 후에도 회계 전문가를 따로 둘 의지조차 갖지 않게 한다”고 지적했다.

비영리단체 특성상 운영비를 대부분 기부금에만 의존하는 것도 문제다. 기부는 결국 기부자의 신뢰를 기반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기부자는 후원금의 용처를 쉽게 의심하지 않는다. 이른바 ‘개미 기부자’가 단체에 지출 내역을 공개하라고 요청하는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단체들도 성실한 회계 공시에 대한 부담을 그동안 덜 가졌다는 얘기다.

문제는 매년 비영리단체가 900개 안팎씩 늘어나고 있지만 회계 관리 수준은 오히려 퇴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행정안전부에 따르면 지난해 1분기까지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지자체)에 등록된 비영리민간단체 수는 1만4404개다. 2016년과 비교하면 3년 만에 2800여개가 늘어났다. 하지만 행안부의 ‘2019년 비영리 민간단체 공익활동 지원사업 평가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행안부 보조금을 받은 220개 단체의 회계평가 평균 점수는 85.40점으로 3년 전인 2016년(89.77점)보다 오히려 4.37점이 낮아졌다. 일부 단체는 ‘보통’(60점)에도 못 미치는 50점을 기록하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이제는 양적 성장보다 질적 성장이 필요한 때”라고 입을 모은다. 무엇보다 비영리단체의 외부감사가 원활하게 이뤄지는 것이 급선무다. 박훈 서울시립대 세무학과 교수는 “변호사들처럼 공인회계사들도 초임 1년 동안엔 교육 이수 과정에 소규모 비영리단체의 회계 관리를 의무적으로 돕는 조항을 넣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말했다.

회계 교육을 더 강조하자는 의견도 있다. 박 교수는 “비영리단체 입장에선 회계 작성시 기부금을 매출로 잡아야 할지, 다른 항목에 넣어야 할지조차 헷갈릴 것”이라며 “장부 작성 기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면 엉터리 회계가 계속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김덕산 한국공익법인협회 회계사는 “지난해 3월 지출목적을 세분화해서 후원자나 단체가 기부금 사용처를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하고, 기부금을 받은 수혜자의 인적사항도 일일이 다 기재하도록 공시 서식이 바뀌었다”며 “담당 공무원조차 바뀐 규정을 제대로 이해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다”고 설명했다.

제도에만 기댈 게 아니라 비영리단체 스스로의 인식 변화도 시급하다. 최호윤 삼화회계법인 회계사는 “미국이나 유럽처럼 비영리단체가 활성화된 곳은 공시 자체를 기부자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한다”며 “정부 부처에서 요구하는 공시 자료 외에도 자체적인 결산서류를 수시로 홈페이지에 공개해야 단체의 신뢰도를 높이는 길이란 걸 깨달아야 한다”고 말했다.

최지웅 기자 woo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