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 28일 아프리카 북동쪽 에티오피아에 있는 지부티 대사관은 자국에 외교행낭을 보냈다. 외교행낭이란 파견국 정부와 재외공간 사이에 외교상 서류나 공공의 사용을 위한 물품 등을 수송하는 데 사용하는 가방인 서류 봉투를 말한다. 함부로 열거나 검사할 수 없는 등 외교적 특권이 부여된다.
행낭 속 물건은 지난 5일 지부티에 도착해 알리사비에주 국립병원에 전달됐다. 물건은 얼굴가림막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감염에 노출된 의료진에게 얼굴가림막은 최소한의 방역망이다. 지부티 대사관은 코로나19로 국경 이동이 어려워지자 외교행낭을 통해 얼굴가림막을 자국에 보냈다.
이 얼굴가림막을 만든 사람은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 공과대학의 김경만(60) 바이오메디컬공학과 교수다. 그가 만든 얼굴가림막은 21일에도 에티오피아 딜라 지역 의료진에게 전달됐다. 지난 달초엔 마다가스카르에도 보냈다. 그는 왜 얼굴가림막을 만들게 됐을까.
김 교수는 24일 국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성경처럼 이웃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을 실천하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이어 “최근 남미가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의 새로운 진원지가 됐다는 세계보건기구 발표가 있었다”며 “남미의 선교사나 단체가 요청한다면 얼굴가림막 제작 방법을 전수할 수 있다”고 전했다.
김 교수는 독일에서 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고 할레-비텐베르크의 마틴 루터 대학교와 스페인 나바라주 나바라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독일 라이프치히 프라운호퍼 세포치료 및 면역학 연구소에서 ‘바이오 나노파이버 그룹’ 연구실장으로도 있었다. 공학자로 후학을 양성하고 연구하던 그는 2015년 에티오피아행을 결정했다.
“감사하게도 학자로 할 수 있는 건 다 했어요. 선교사는 아니지만 이제 누군가 도우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는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대학에서 교수로 있으면서 지역 교회에 태양광을 설치해 줬다.
“수도인 아디스아바바만 벗어나도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나라에요. 주민들이 휴대전화를 충전하려면 읍내로 나가야 하는데 교회에 전기가 들어오면 그들이 교회에 올 거라 생각했죠.”
얼굴가림막도 에티오피아 주민들을 위해 제작하기로 했다.
김 교수는 “의료종사자들은 바이러스에 감염될 위험이 높아 개인보호 장비가 필요한데 아프리카 국가들은 제작 기술도, 구입할 돈도 없어 외국 원조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라고 했다.
김 교수는 3D 프린터로 만든 얼굴가림막이 떠올랐다. 학생 교육을 위해 지난해 사비로 산 3D 프린터기도 있었다.
“늘 아이디어는 하나님이 주신다고 생각했어요. 조건만 보면 여기는 물자도, 장비도 없어요. 하지만 하나님이 아이디어를 주셨는데 고민할 필요가 없었어요.”
최소한의 물자로 최대의 효과를 낼 수 있는 아프리카 맞춤형 모델을 만드는 게 과제였다. 실패를 거쳐 완성품이 나왔다. 얼굴에 부착하는 프레임(헤어밴드)만 3D 프린터로 만들고 OHP 필름을 붙여 얼굴을 가리는 방식이다. 밴드 하나를 출력하는데 2시간이면 됐고 플라스틱 사용량도 최소한으로 맞췄다.
“최종 디자인은 1달러 미만으로 저렴해요. 비용도 비용이지만 어떤 3D 프린터로든 만들 수 있어요. 필름만 교체하면 플라스틱 프레임은 살균 처리해 재사용할 수 있어요.”
전기사정이 좋지 않고 프린터가 한 대라 하루 20시간 이상 돌려도 겨우 10개 만드는 게 아쉬울 뿐이었다. 현지 한인들이 도움을 줬다. 기독교 이념을 바탕으로 설립된 한국의 NGO 월드쉐어와 사랑밭은 재료 공급부터 에티오피아, 마다가스카르, 지부티에 얼굴가림막을 공급하는 다리 역할을 했다. 같은 대학에 근무 중인 한국인 동료 교수는 살균기 제작에 필요한 자외선 램프를 제공했다. 마다가스카르와 지부티의 한인 선교사는 지역 의료시설에 얼굴가림막을 전달했다.
김 교수는 한국교회에 기도도 요청했다.
“주어진 여건에서 해야 할 일, 할 수 있는 일을 실천하려고 합니다. 물질이 아니더라도 한국교회가 저희의 실천에 관심을 기울여 주시고 기도해 주셨으면 합니다.”
서윤경 기자 y27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