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희상 국회의장이 21일 41년의 정치 여정을 마치며 마지막 ‘봉숭아 학당’을 열었다. 봉숭아 학당은 문 의장이 1990년대 초반 이기택 총재의 비서실장 당시 이 총재의 집에서 매일 아침 기자들과 아침을 먹으며 격의 없이 질문과 답변을 했던 자리에 붙여진 별명이다. 그는 떠나면서도 문재인정부와 177석 ‘슈퍼 여당’에 대한 걱정을 하며 ‘협치’를 당부했다.
문 의장은 이날 국회 사랑재에서 가진 퇴임 기자간담회에서 1979년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첫 만남으로 시작한 정치 여정을 회고하며 “아쉬움은 남아도 후회 없는 정치 인생이었다”고 진솔한 속내를 털어놓았다.
문 의장은 정치 인생에서 가장 기뻤던 순간을 김대중 전 대통령이 당선됐을 때로 꼽았다. 그는 “데모하면서 박정희와 싸우던 시절부터 유신 시절 통일국민주체회의 대의원이었던 아버지와 평생 화해하지 못했는데, (김 전 대통령이) 당선된 날 아버지 묘소를 가서 큰절을 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아버지 내 말이 맞았죠’ 그 말을 하고 싶었다. 그날 진정성 있는 화해를 하고 오열했다”며 “그날의 의미가 크다. 그날 이후의 삶은 덤으로 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가장 슬픈 순간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날이라고 했다. 문 의장은 “문재인 대통령이 전화해서 ‘(노 전 대통령이) 돌아가셨다’고 말하는데 그 말 한마디에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아무것도 모르겠다고 느꼈다”며 “우리가 지키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회한과 자책을 했다”고 토로했다.
20대 국회 하반기 의장 재임 중엔 검찰개혁 법안이 통과되던 날을 가장 기쁜 동시에 슬펐던 순간으로 꼽았다. 문 의장은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대통령의 한결같은 꿈이 검찰개혁과 공수처 설치였다”며 “3명의 대통령의 염원을 마무리 지을 수 있어 기뻤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그날이 제일 슬프고 가슴 쓰린 날이었다”며 “내가 입만 열면 협치를 말한 사람인데 법안을 강행 처리하는 상황이 기쁠 수만은 없었다. 그래도 내가 똥바가지를 쓸 수밖에 없었다”고 당시의 고충을 털어놓았다.
문 의장은 평생 협치의 정치를 강조해왔다. 그는 이날도 문재인 대통령과 177석의 거대 여당, 그리고 총선 패배를 겪은 보수 야당을 향해 누누이 협치를 당부했다. 그는 “통합이라는 측면에서 국회를 무시하면 안 된다”며 “집권자가 생각할 때는 국회가 장애물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문 대통령이) 국회가 민주주의의 꽃이라는 것을 잘 알 거다. 초심만 변하지 않으면 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지금 (문 대통령이) 당선자 시절 각 당 대표를 방문했던 마음을 지금은 왜 못 가지나”라며 “밀어붙이려고 하지 말고 합의를 하려고 하면 이런 적기가 없다”고 말했다.
문 의장은 “국회는 서로 싸워야 한다. 민주주의는 다원성이 원칙이고 서로 다른 생각이 들어와야 한다”며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독선이고 오만이다”라고 말했다. 여당을 향해선 “여당은 여당다워야 한다”며 “청와대가 하라는 대로 거수기 노릇을 하는 것은 여당답지 못하다”고 제언했다. 야당에 대해선 “당연히 (정권을) 비판을 해야 한다”면서도 “(20대 국회 때 야당은) 너무 자신감이 없었다. 정책 대안을 내지 못하고 무조건 반대만 했다”고 아쉬워했다.
문 의장은 아들 문석균씨의 지역구 세습 논란에 대해서도 입을 열었다. 문 의장은 “내가 천하의 문희상인데, 내 위치를 이용한다고 할 때 말할 수 없는 심정을 느꼈다”며 “아들을 출세시키려는 사람으로 매도하고, 아들은 아비 덕이나 보는 사람으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이어 “민주당은 공당이 아니라 아비가 아들에게 공천해 주는 당이라고 스스로 모멸하는 것 아니냐”며 “결과적으로 동지들도 그 논리에 함몰되는 것이 너무 아쉽고 너무나 쓰라렸다”고 했다.
문 의장은 이제 국회를 떠나 소박한 일상으로 돌아간다. 남은 계획을 묻는 말에 문 의장은 “텃밭을 만들 기운이 있을지 모르겠는데 10평짜리 꽃밭이 있으면 좋겠다”며 “쌈을 좋아하니까 (텃밭이 있으면) 쌈은 계속 먹지 않을까 하는 꿈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기자들을 향해 “늘 이야기하지만, 언론인과 정치인의 관계는 동업자 관계”라며 “시대정신이 무엇인지 매일매일 다퉈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무슨 일을 해도 국민에게 올바르게 전달돼야 하는 것 아닌가”라며 “파리 등 곤충은 매일 아침 더듬이를 수선하는 게 일이다. 기자는 매일매일 방향 감각을 잃지 않게 노력해야 한다”는 당부로 마지막 ‘봉숭아 학당’을 마쳤다.
김나래 김용현 기자 fac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