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여파 속에서 ‘드라이브 인 시어터(자동차극장)’이 문화예술계의 대안으로 떠올랐다. 자동차극장은 대형 스크린에 영상이 비칠 때 자동차 라디오의 FM주파수로 소리를 듣는 형태의 극장이다. 문자 그대로 자동차에 탄 채 관람하기 때문에 바이러스 감염으로부터 안전하다.
자동차극장은 미국에서 1910년대 처음 등장해 자동차 산업이 급성장하던 1940~60년대 약 4000개를 헤아리며 정점을 찍었다. 국가마다 자동차극장의 도입이나 성장이 다르지만, 한국에선 가구마다 차량이 보급된 1990년대 가장 인기를 끌어 전국적으로 60개가 운영됐다. 그러나 20세기 들어 한국을 비롯해 전 세계적으로 영화는 물론 볼거리 많은 멀티플렉스가 자리 잡으면서 자동차극장의 수도 감소했다. 또한 교외에서 자연의 정취를 즐기며 영화를 보는 이벤트 장소 정도에 머물렀다.
하지만 코로나19의 세계적 대유행 속에 자동차극장이 화려하게 부활했다. 그동안 관객이 없던 국내외 자동차극장이 차를 몰고 온 관객들로 가득 차는가 하면 곳곳에서 새롭게 만들어지고 있다. 또 자동차극장의 전유물이었던 영화만이 아니라 음악, 오페라, 무용 등 공연예술 분야에서도 앞다퉈 드라이브 인 시스템이 도입되고 있다.
지구촌 메가트렌드가 된 자동차극장
지난 1일 이란 수도 테헤란에는 1979년 이란 혁명 이후 금지됐던 자동차극장이 문을 열었다. 코로나19로 사회적 거리두기가 강조되면서 지난 2월부터 이란에선 영화관과 공연장 등의 운영이 중단된 상태다. 테헤란시는 코로나19로 집 안에서 답답한 생활을 해야 하는 시민들을 위해 밀라드 타워의 야외 주차장에 임시로 대형 스크린을 설치하고 자동차극장을 직접 만들었다.
이슬람교 율법에선 부부나 가족이 아닌 남녀가 실내에서 단둘이 있는 것을 금지하지만 테헤란의 자동차극장은 혼인 증명서나 가족관계 증명서 없이도 남녀가 함께 관람할 수 있도록 했다. 이란의 보수파들은 율법에 어긋난다며 비판하고 있지만, 자동차극장은 대중의 열렬한 지지 속에 성업 중이다.
코로나19의 장기화 속에서 구미 각국에선 새로운 자동차극장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독일에서는 코로나19 확산 이후 3개월 만에 30개의 자동차극장이 새로 만들어졌다. 현재 50개 정도인 자동차극장은 앞으로도 더 늘어날 전망이다. 독일 일간지 도이치벨레는 “자동차극장이 독일에서 르네상스를 맞고 있다. 주말이 아닌 주중에도 매진 사례가 이어지고 있다”고 전했다.
리투아니아 수도 빌뉴스에서는 지난달 29일 코로나19 여파로 비행기 운항이 거의 중단된 국제공항이 자동차극장으로 변신했다. 빌뉴스 국제영화제 사무국은 공항 측과 협의를 통해 주차장과 하역장 건물에 대형 스크린을 설치해 영화를 상영하고 있다. 코로나19로 힘든 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위안을 주기 위해서다. 여전히 비행기 운항이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어 매일 밤 공항 주차장에는 200여대의 자동차가 몰리고 있다.
자동차극장의 고향인 미국 역시 영화관이 대부분 폐쇄되면서 305개의 자동차극장이 호황을 맞은 상태다. 한국 역시 수도권의 자동차극장 관객 수가 코로나19 사태 이전보다 최소 수십 퍼센트가 증가한 것으로 추정된다. 입장료가 자동차 1대당 2만원 안팎이라서 2인 이상 타면 일반 영화관보다 저렴한 가격에 영화를 즐길 수 있는 것도 장점이다. 경기도 파주시에서 자유로자동차극장을 관리하는 윤혜경 실장은 “코로나19가 빠르게 퍼진 2~3월에는 지난해 같은 기간과 비교해 50% 정도 관객이 늘었다”며 “5월 하순 현재는 신작이 많지 않아 조금 줄었지만, 여전히 지난해보단 10% 정도 높은 수준”이라고 전했다.
오페라도 콘서트도 자동차극장에서
코로나19 시대에 자동차극장의 가능성은 영화 외에 여러 분야의 관심을 받고 있다. 최근 무관중을 전제로 재개 움직임을 보이는 프로 스포츠가 대표적이다.
덴마크 프로축구 수페르리가(1부) 소속의 FC 미트윌란은 지난 4월 중순 2019~2020 시즌이 재개될 경우 당국과 협의해 ‘드라이브 인 축구’를 선보일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약 1만명의 팬들은 대형스크린이 설치된 자동차극장에서 경기 중계를 볼 수 있다. 최근 미국 일간지 LA타임스도 프로야구와 프로농구가 재개되면 여러 구단이 팬을 위해 자동차극장에서 경기 중계하는 것을 고려하고 있다고 전했다. 팬들이 기본적으로 경기장에서 좋아하는 팀을 연호하며 함께 관람하는 것을 선호하기 때문에 중계로나마 그 즐거움을 느끼게 하겠다는 것이다.
심지어 영화나 스포츠 중계 등 영상만이 아니라 실제 라이브 공연에서도 자동차극장을 도입하고 나섰다. 자동차 창이 가로막고 있어서 무대예술 특유의 생동감은 다소 떨어지더라도 감염에 취약한 실내 공연장을 대신해 안전하게 라이브 공연을 펼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3월 중순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온라인 라디오 방송국 덥랩(Dublab)이 지역 뮤지션들과 함께 슈퍼마켓 주차장에 무대를 세우고 공연을 한 것은 드라이브 인 콘서트의 효시 격이다. 코로나에 지친 로스앤젤레스 시민들을 위해 깜짝 기획된 이 콘서트는 호평을 받았다. 자동차에 탄 시민들은 콘서트가 끝났을 때 경적을 울리고 깜빡이를 켜는 방식으로 뮤지션들에게 환호했다.
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하면서 컨트리음악 스타인 키스 어반 등 유명 가수들도 드라이브 인 콘서트에 나섰다. 또 음악산업계를 리드하던 콘서트 기획사들은 실내 공연 대신 드라이브 인 콘서트를 위해 지역 주차장과 공터를 찾아 계약에 나섰다. 독일 등에서는 클럽이 실내 공간을 포기하고 야외에서 드라이브 인 레이브 파티를 열기도 했다.
대중음악이나 클럽만이 아니라 클래식음악에서도 드라이브 인 콘서트가 등장했다. 독일 피아니스트 알렉산더 크리첼은 지난 9일 독일 서부 소도시 이절론에서 세계 최초로 드라이브 인 리사이틀을 열어 화제를 모았다. 크리첼은 영화관의 야외 주차장에 무대를 세운 뒤 자동차 1대당 32유로의 입장료를 받고 베토벤과 리스트를 연주했다. 또 영국에서는 잉글리시 내셔널 오페라(ENO)가 오는 9월 세계 최초로 드라이브 인 오페라를 시도하겠다고 발표했다. ENO는 9월 중순부터 3주간 런던 북부에 있는 알렉산더 팰리스 공원에서 푸치니의 ‘라 보엠’과 모차르트의 ‘마술피리’ 등을 공연할 예정이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어서 드라이브 인 콘서트가 잇따라 열리고 있다. 용인문화재단이 지난달 25일 용인시민체육공원에서 국내에서 처음 시도한 이후 서울 서초구, 진주, 일산 등에서 등장했다. 코로나19에 지친 주민들을 위로하기 위한 무료 콘서트여서 대중음악, 클래식 등 장르를 다양하게 섞은 것이 특징이다. 특히 서초구는 아예 5월 한 달 동안 매주 일요일 저녁 서초구청 야외 특설무대에서 자동차를 탄 채 서초구립교향악단의 다양한 연주를 들을 수 있는 ‘서리풀 드라이브인 콘서트’를 선보이고 있다.
최근 구미 공연계에서 6월부터 공연장이 일부 문을 열 계획이지만 무대와 객석 모두 ‘거리두기’를 지켜야만 한다. 현재 규정대로라면 실내 공연장은 기존 좌석의 20~25%만 팔 수 있는 심각한 상황이어서 자동차극장이 공연계에서도 빠르게 도입될 것으로 보인다는 예상이 나오고 있다. 한국에서는 오는 23일 강원도 주최 ‘DMZ 평화이음 드라이브 인 콘서트’는 티켓 예매 시작 일주일 만에 500대 분량의 티켓이 매진됐다.
물론 공연계의 ‘드라이브 인’ 시스템은 과제가 적지 않다. 아티스트 입장에서 낯선 환경인 것은 물론이고 라디오로 소리를 전달하기 때문에 섬세하고 생생한 음향을 구현할 수 있는지가 관건이다. DMZ 평화이음 드라이브 인 콘서트에 출연하는 가수 이승철은 “데뷔 35년 차인데도 드라이브 인 콘서트는 처음 경험하는 형식”이라면서 “관객은 자동차라는 국한된 공간에서 창 너머로 공연을 봐야 해 시야가 좁아지고, 아티스트는 환호와 박수 소리가 비상등과 클랙슨 소리로 대체되는 만큼 관객과 주고받는 에너지를 다르게 느낄 것 같다”고 말했다.
강경루 기자 ro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