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이야 뭐…. 허허.”
SK 와이번스 염경엽(52) 감독은 키움 히어로즈와 2020시즌 프로야구 정규리그(KBO리그) 원정 2차전을 앞둔 20일 서울 고척스카이돔 인터뷰실에서 ‘잠을 잤느냐’는 질문을 받자 말을 잇지 못하고 어색하게 웃었다. ‘잘 잤다’고 답하면 돌아올 팬들의 반응이 대체로 뻔하다. ‘지금 잠이 오는가.’
‘잠들지 못했다’는 대답에선 더 다양한 반응을 예상할 수 있다. ‘감독이 잠들지 못할 만큼 불안하면 선수들은 더 흔들릴 테지.’ 혹은 이런 반응도 예상이 가능하다. ‘염 감독에게 밤잠을 설칠 정도로 더 큰 고민이 생긴 것일까.’
손쓰기 어려울 만큼 처참한 상황은 가끔 외통수에 걸린 장기판의 기물처럼 꼼짝 못할 경직을 몰고 온다. 염 감독의 헛웃음은 SK의 올 시즌 초반 부진에서 복잡한 속내를 함의한 대답이나 다름없었다. 말을 잇지 못할, 이을 말도 없는 사령탑의 함구가 한때 프로야구에 ‘왕조’를 건설했던 SK의 현재를 말해 준다.
SK가 연패를 10회에서 끊었다. SK는 이날 키움을 5대 3으로 잡고 뒤늦은 시즌 2승(11패)을 수확했다. 자칫 20년 만에 대참사가 벌어질 뻔했다. SK는 창단 첫해인 2000년 6월 23일부터 7월 5일까지 팀 사상 최다로 기록했던 연패 타이기록까지 1패만을 남기고 이날 경기에 임했다. 패배했을 경우 21일부터 한 번의 패배마다 연패 신기록을 쓰게 될 처지였다.
SK는 지금까지 한국시리즈에서 4차례(2007·2008·2010·2018년), KBO리그에서 3차례(2007·2008·2010년) 우승했다. 2000년대 후반은 SK가 프로야구에 ‘왕조’를 세웠던 시기다. 이 틈에 올 시즌 미국프로야구 메이저리그 데뷔를 준비하는 에이스 김광현을 배출하기도 했다.
SK는 2018년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왕가’의 위상을 최근까지 이어왔다. 지난해 KBO리그에서 시즌 후반부에 무너져 두산 베어스에 우승을 빼앗긴 마지막 날까지 선두는 SK였다. SK의 올 시즌 초반 부진이 도드라지는 이유는 그저 두 자릿수로 늘어난 연패의 숫자 때문만은 아니다.
염 감독도, SK 선수들도 힘을 냈다. SK 선수들은 이날 작은 소리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돔구장에서 3루 방향 더그아웃에 자리를 잡고 시종일관 환호성을 지르거나 박수를 치며 타석과 마운드, 내·외야의 동료들을 응원했다. 응원의 힘이었을까. SK는 이날 역전과 재역전을 거듭하는 롤러코스터게임을 펼쳤다.
선취점을 키움에 헌납했지만, 결승점은 SK이 몫이었다. 키움은 1회말 1사 때 김하성의 솔로 홈런으로 포문을 열었다. SK는 곧 승부를 뒤집었다. 2회초 2사 1·2루에서 김성현의 중전 적시타로 동점을 만든 뒤 3회초 2사 주자 없는 상황에서 시속 142㎞로 고척돔의 허공을 가른 타구를 좌중간 관중석으로 떨어뜨린 외국인 타자 제이미 로맥의 솔로 홈런으로 달아났다.
키움은 5회말 무사 1·2루 때 이정후의 좌전 적시타, 이어진 2사 2·3루에서 SK 선발 박종훈의 폭투를 파고든 3루 주자 김하성의 홈 질주로 2점을 얻고 되받았다. 그러자 SK는 6회초 무사 1·2루에서 남태혁의 적시타, 계속된 무사 만루 때 내야 땅볼을 치고 출루한 김창평의 타석에서 홈으로 질주한 3루 주자 한동민이 살아나면서 2점을 뽑고 4-3 재역전에 성공했다.
남태혁은 이 과정에서 시즌 첫 안타와 타점을 수확했다. 타격의 손맛을 본 남태혁은 7회초 2사 1·2루에서 우익수 오른쪽으로 흐르는 1루타를 치고 2루 주자 로맥을 홈으로 불러 타점을 추가했다. 앞서 2경기 출전에 5타수 무안타로 0점이던 남태혁의 타율은 이제 0.333이 됐다.
이 모든 순간마다 SK 더그아웃에 있는 선수들은 환호성과 박수로 동료들을 응원하고 격려했다. 염 감독은 이런 선수들을 볼 때마다 가슴 한쪽이 저려 온다고 했다. 염 감독은 경기 전 인터뷰에서 “선수들이 경기 중에 팀 분위기를 살리려고 노력한다. 그 모습에 가슴이 아프다. 선수들은 무언가를 해내려는데, 잘 맞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염 감독은 경기를 마치고 누구보다 기뻐했을 선수들을 다독였다. 염 감독은 “연패 기간에 선수들의 고생이 많았다. 연패를 끊기 위해 단합하는 선수들의 모습이 좋았다. 남은 경기에서 편안하고 담담하게 자신의 역할을 한다면 좋은 시즌을 보낼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SK는 이제 탈꼴찌를 조준하고 있다. 21일 오후 6시30분 같은 장소에서 키움과 원정 마지막 3차전을 갖는다. 중간 전적에서 나란히 5승 8패를 기록한 공동 8위 한화 이글스와 삼성 라이온즈는 SK를 3.5경기 차이로 앞서고 있다.
김철오 기자 kcopd@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