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에 멍든 유럽… 또 한번 재정위기 맞을까

입력 2020-05-17 17:49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유럽 경제의 기초체력이 크게 떨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은행은 17일 발간한 ‘코로나19 사태 이후 유로지역 리스크 점검’ 보고서에서 이탈리아 스페인 등 일부 남유럽 국가를 중심으로 부실이 확산될 수 있다고 평가했다.

한은 미국유럽경제팀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2010년대 초반 재정위기를 경험한 유로 지역이 금번 코로나19 사태 겪으면서 유사한 상황이 다시 불거질 가능성도 제기된다”고 지적했다.

유로지역은 실물경제가 상당히 위축된 가운데 주가 급락, 금리 스프레드 확대 등 금융부문에서도 불안이 확산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지난달 국제통화기금(IMF)은 올해 유로지역 실질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을 -7.5%로 전망했다. 이탈리아(-9.1%) 스페인(-8.0%) 프랑스(-7.2%) 독일(-7.0%) 등 주요국이 모두 크게 하락할 것으로 예상했다.


미국유럽경제팀은 “과거 유로지역 재정위기는 역내 국가 간 불균형, 일부 국가의 금융·재정 취약성, 전반적인 성장률 둔화 등이 복합적인 원인으로 작용했는데 이 중 일부는 금번 사태에도 리스크 확대 요인으로 작용할 여지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들은 코로나19 충격에 따른 세입 감소와 정부지출 증가로 유로지역 국가의 재정지표가 크게 나빠질 것으로 봤다. 유로지역 기초재정수지 비율은 2019년 0.9%에서 올해 -7.1%로 8.0% 포인트 하락했고, 정부부채 비율은 같은 기간 86.4%에서 102.0%로 15.6% 포인트 상승했다.


종합적으로 판단할 때 일부 남유럽 국가의 재정 상황이 상대적으로 취약해질 것으로 예상됐다. 전염병 확산세가 심각한 이탈리아는 코로나19 사태 이후 정부부채 비율과 기초재정수지 비율이 가장 크게 나빠진 것으로 나타났다. 스페인 프랑스 포르투갈 벨기에 등도 악화 정도가 크다.

과거 재정적자와 정부부채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은 국가에서 유럽 재정위기가 시작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코로나19발 경제위기는 남유럽을 중심으로 번질 가능성이 높다는 지적이다. 미국유럽경제팀은 단기간에 채무불이행 사태가 발생할 가능성을 낮게 판단하면서도 일부 남유럽 국가의 부도위험이 상대적으로 높고 신용등급도 투자등급 하한에 근접한 점을 지적했다.

이탈리아와 스페인의 신용부도스와프(CDS) 스프레드(5년물)는 지난 7일 기준 각각 2.37% 포인트, 1.25% 포인트로 코로나19 본격 확산 이전인 1월 말(각각 1.07% 포인트, 0.38% 포인트)에 비해 크게 확대됐다. 독일 프랑스의 CDS 스프레드가 각각 0.24% 포인트, 0.42% 포인트로 낮은 수준을 유지하는 것과도 대조된다.


신용평가사 피치는 최근 이탈리아의 신용등급을 BBB에서 투기등급 바로 윗단계인 BBB-로 낮췄다. 신용등급이 낮아지면 중앙은행과 대형 금융기관이 국채를 매입할 수 없거나 보유 비중을 줄여야 하기 때문에 급매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다만 무디스와 피치가 이탈리아의 신용등급을 투자등급 최하단으로 평가하면서도 신용등급 전망을 ‘안정적’으로 평가하는 만큼 갑자기 투기등급까지 떨어지지는 않으리라는 게 한은 설명이다.

여기에 유럽중앙은행(ECB)이 지난달 7일 이후 ‘투자부적격’ 수준으로 하락한 자산도 BB등급 이상을 유지하면 적격담보로 인정하기로 하면서 신용등급 하향조정에 따른 충격은 다소 완화될 것으로 기대된다.

일부 남유럽 국가의 경우 은행의 자국 국채 보유 비중이 높다는 점은 일종의 뇌관이다. 국채금리가 상승하면 평가손실 위험에 노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말 ECB는 10년물 독일 국채 기준으로 금리 상승폭이 1.0% 포인트일 때 9.3%, 2.0%일 때 17.6%의 평가손실이 발생하는 것으로 추정한 바 있다.


유럽은 주요국 은행 간 상호 익스포저(연관 금액)이 커 한 나라의 손실이 다른 나라로 확산될 위험도 크다. 미국유럽경제팀은 “이탈리아와 스페인 은행들은 은행채 및 국공채에 대한 상호 익스포저가 높고, 프랑스도 이탈리아·스페인에 대한 익스포저가 큰 편이어서 한 국가의 부실이 연쇄적으로 전이될 가능성이 있다”고 기술했다.

각국이 코로나19에 대응하기 위해 재정지출을 확대하면서 올해 유로지역 정부부채 비율은 크게 상승할 것으로 예상된다. 금리 차별화 과정에서 재정취약국의 조달비용이 커지면 정부부채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재부각될 수밖에 없다. 국채금리가 잠재성장률을 오랫동안 웃돌면 정부부채 비율이 지속적으로 늘어 재정건전성을 달성하기 어려워진다.

코로나19 확산은 기존 ‘스트레스 테스트’의 위험 상황을 상회하는 충격인 만큼 은행의 수익성과 건전성은 더욱 크게 악화될 가능성이 높다. ECB가 은행 복원력 평가를 위해 설정한 스트레스 상황에서 연간 실질 GDP 성장률은 -1.7%, 국채금리(10년물) 상승폭은 1.30% 포인트로 지금에 비하면 양호한 수준이다.

특히 실물 부문의 충격은 쉽게 회복하기 어려울 것으로 평가된다. 미국유럽경제팀은 “코로나19 확산 후 이동제한, 휴업·휴교 등 각국의 대응은 경제활동 전반을 중단하는 강력한 조치들인 데다 사회적 거리두기와 대인기피증 확산으로 향후 정상화에 상당한 시일이 걸릴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코로나19 감염 피해가 심각한 국가 중 상당수가 도소매, 항공운송, 음식·숙박, 문화·예술 등 서비스업 산업 비중이 높다. 바이러스가 진정되더라도 소비심리 회복과 실제 소비 사이에 2~3개월의 시차가 있어 소비의 빠른 회복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평가됐다.


미국유럽경제팀은 “유로지역에서 코로나19로 인한 경제적 리스크 심화 여부는 재정 부문에 대한 보강 여부에 크게 좌우될 것으로 판단된다”며 “개별 국가는 물론 유로지역 전체의 재정 여력이 리스크 경감과 경제 회복의 관건”이라고 말했다.

강창욱 기자 kcw@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