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따위 혼인증서” 현재로 소환된 ‘춘향’의 일갈

입력 2020-05-13 18:24 수정 2020-05-13 18:30
'춘향' 프레스콜. 연합뉴스


“난 이따위 혼인증서 믿지 않아요.”

춘향은 몽룡이 가져온 혼인증서를 찢어버린다. 이 극에서 춘향은 사내의 증서 한 장에 마음 졸이는 가련한 여인이 아니다. 판소리 원전의 춘향은 몽룡에게 받은 혼인서약 증서를 소중히 품고 다닌다. 달라진 원전의 면모를 살펴볼 수 있는 장면은 이뿐 아니다. 춘향가의 시작을 알리는 오월 단옷날의 광한루 서사도 그네를 타는 춘향의 시점에서 시작하고, 아버지 이사또를 따라 서울로 올라간 몽룡은 봄에 떠나 같은 해 가을에 돌아온다. 춘향이 고초를 겪는 몇 년 동안 편지 한 장 없던 그 시절 몽룡도 아닌 셈이다.

춘향과 몽룡의 사랑 이야기를 현대적으로 되살려낸 이 작품은 국립극장 국립창극단의 ‘춘향’. 오는 14~24일 서울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선보이는 이 창극은 수백년간 사랑받은 고전 ‘춘향가’를 전통적인 틀 속에 현대적 서사를 덧대 풀어낸다. 김소희 안숙선 유수정 박애리 등 당대 최고의 소리꾼들이 거쳐 간 춘향 역에는 창극단 대표 주역 이소연과 신예 소리꾼 김우정이, 몽룡 역에는 창극계 스타 김준수가 캐스팅됐다.

젠더 전복적인 서사라고 보기는 어려워도, 그간 가부장적 시선으로 되풀이돼왔던 고전을 공감 가능한 수준까지 끌어낸 연출이 돋보인다. 노무현정부 시절 문화부 장관을 지낸 배우 겸 연출가 김명곤이 쓰고 연출했다. 그는 13일 달오름극장에서 열린 기자간담회 자리에서 “역점을 둔 부분은 200~300년 전의 춘향이를 2020년도로 데려오는 것이었다”며 “춘향, 몽룡과 비슷한 나이 또래의 10~20대 청춘남녀들이 두 인물에게 공감할 수 있도록 과감하게 이야기를 다듬었다”고 밝혔다. 이야기를 줄이면서 속도감은 그만큼 빨라졌다.


배우 겸 연출가 김명곤. 연합뉴스


변학도 부임을 축하하는 ‘기생점고’ 장면은 춘향과 같은 상황에 놓인 여성들이 겪어야 했던 부조리의 상징으로도 여겨진다. 김 연출가는 “시대가 요구하는 여성다움과 권력에 대한 순종을 거부한 결과로 춘향은 감옥에 갇힌다. 춘향이 부르는 ‘옥중가’의 비극적 아름다움은 이전의 장면과 대비되며 극적인 절정에 치닫는다”고 전했다. 춘향에는 양반의 자제로 태어나 아버지에게 출세를 강요받는 몽룡의 아픔도 한층 두드러져 있다.

춘향이 젊은 층은 물론 중·장년층에게도 매력적일 것으로 예상되는 이유는 판소리의 아름다움이 곳곳에 묻어나서다. 기자간담회에 앞서 선보인 ‘사랑가’, ‘이별가’ 등 대목에서는 절절한 감성이 느껴졌다. 춘향은 지난해 4월 국립창극단에 부임해 ‘소리’의 중요성을 역설해왔던 유수정 예술감독이 선보이는 신작이기도 하다. 작창을 맡은 유 감독은 “30대 초반 단원으로 춘향 역을 했을 때는 지금의 춘향보다 훨씬 더 느린 템포였고, 의상도 소박했다. 시대에 따라 작품도 변화해야 하지만, 우리 소리의 아름다움만큼은 보전돼야 한다는 게 제 소신”이라며 “배우들에게 숨소리 하나 허투루 하지 말고 한 땀 한 땀 불러 달라고 요구했다”고 설명했다. 극적 긴장감을 키우기 위해 국악기 가야금·거문고·대금·피리·아쟁 외에도 기타·신디사이저·베이스드럼 등 서양 악기를 추가해 음악적 밀도를 높였다.

한국의 서정적인 멋을 간직한 무대 연출과 무대 뒤편을 채우는 영상, 한복 등도 눈길을 끈다. 뮤지컬 ‘레베카’ ‘엑스칼리버’의 무대디자이너 정승호, 뮤지컬 ‘웃는 남자’의 조명디자이너 구윤영, 창극 ‘패왕별희’의 영상디자이너 조수현,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의 의상·장신구디자이너 이진희 등이 작품에 참여했다.

1962년 ‘춘향전’으로 창단한 국립창극단에게 춘향은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작품이기도 하다. 올해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으로 멈췄던 국공립단체(기관)가 공연에 재시동을 거는 첫 작품이라는 의미도 더해졌다. 좌석 거리두기와 발열 체크, 손 소독제 비치 등을 통해 극장 방역에 만전을 기한다. 김 연출가는 “방역 상 배우들 10명 이상이 모일 수 없어 3개월간 한 장면씩 다듬어 합치는 과정을 반복했다”며 “이 작품이 코로나19에 힘들어하는 시민들에게 웃음과 눈물, 에너지를 안겨드리는 작품이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강경루 기자 ro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