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금한 미술]지붕에 갓 씌웠더니…그제야 “됐소”

입력 2020-05-13 09:44 수정 2020-05-13 10:00
1984년 해가 밝았다. 예술의전당 국제현상 공모에 당선된 김석철(1943∼2016) 건축가는 새해의 기분을 느낄 수 없었다. 주관 부처인 문화공보부 이진희 장관에게 개별 건물에 관한 설계안을 올렸는데, 번번이 그가 묵묵부답이었기 때문이다. 석 달 동안 10번도 넘게 올린 것 같았다. 망연자실하던 그에게 어느 날 영감이 떠올랐다. 쓱쓱 스케치한 뒤 모형을 만들고는 최후의 심정으로 올렸다. 이 장관이 대뜸 이렇게 말했다.
지난 11일 시민들이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 앞을 지나고 있다. 5공화국 시대의 대표적인 건축물인 예술의전당은 이 오페라하우스의 갓 모양 지붕이 그 이미지를 표상한다. 권현구 기자

“이럴 줄 알고 내가 여태 기다린 것이오. 이제 아무도 더 간섭하지 못하게 할 테니까 마음대로 하시오. 김석철씨는 머리가 좋으니까 기능적으로 훌륭한 건물을 만들 테지만, 국가적 상징성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었는데, 이제는 되었소.”

10번 넘게 퇴짜…전통의 표상이 있어야!

서울의 2호선 서초역 사거리의 ‘서초동 향나무’는 유명하다. 이곳에서 남쪽의 우면산을 향해 가다 보면 멀리서부터 예술의전당이 한눈에 쑥 들어온다. 그 강렬한 존재감은 갓 모양 지붕에서 온다. 전통을 직역한 듯해 촌스럽기까지 한 건물의 이미지는 관료가 건축가를 좌지우지하던 그 시절, 그렇게 탄생했다.

예술의전당은 5공화국을 대표하는 건축물이다. 표상하는 외관뿐 아니라 만들어지는 과정 모두에서 신군부의 군사 문화적 발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기념비적 문화시설이란 “누가 보거나 아! 하는 느낌이 있는 대중적이며 예술적인 한국적 조형이어야 한다”는 게 그 시절 관료들의 생각이었다. 한국적인 것, 전통적인 것에 대한 포로가 돼 있었다.

해방 이후의 모든 시대가 그랬던 건 아니다. 미 군정 시기를 거친 직후의 1950년대 이승만 시대는 모더니즘 건축이 득세했다. ‘서구적’ 민주주의가 절대가치였고, 한국적인 것은 벗어나야 할 구습이었다. 그러니 한국적인 어떤 이미지도 연상되지 않는 모더니즘적인, 직사각형의 우남회관(이승만 대통령의 호 ‘우남’을 딴 건물로 화재로 소실된 뒤 세종문화회관이 들어섬)이 1961년 서울 한복판 세종로에 들어설 수 있었다.

박정희 정권 들어 사정이 달라졌다. 시대의 키워드로 ‘민족’이 부상했다. 유엔 주재 미국 대사 스티븐슨이 북한을 유엔으로 초청하는 등 일련의 정치적 사건을 겪으며 반미 감정이 생겨난 것도 작용했다. 쿠데타로 들어선 박정희 군사 정권은 통치 명분을 ‘한국적’ 민주주의에서 찾으며 ‘민족성’을 내세웠다. 박정희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들어선 신군부 정권에서도 그런 기조는 이어졌다. 건축은 그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다. 예술의전당에도 민족적 표상이 들어가야 했다.
김석철 건축가.

그런데 5공 시대의 관료가 비로소 고개를 끄덕인 전통의 이미지가 조선 시대 도포 자락 휘날리던 선비들이 쓰던 ‘갓’이라는 사실은 흥미롭다. 구한말 개항 이후 이 나라를 찾은 서양인들에게 조선은 ‘모자의 나라’로 각인됐다. 초대 주한 영국 영사를 지낸 윌리엄 칼스가 조선을 여행하고 쓴 ‘조선 풍물지’에도 모자에 대한 인상이 나온다. “머리에 꼭 맞게 짜인 원뿔형에다가 3∼4인치의 둥근 접시 모양으로 밑에 테를 두른” 모자. 그것은 갓이었다.

88올림픽에 맞춰 초고속…섬 같은 위치가 더 문제

예술의전당은 88올림픽이 탄생시킨 문화공간이다. 88올릭픽은 전 세계인을 한국으로 부르는 단군 이래 최대의 국제행사였다. 그런 기회에 한국을 알릴 국가적 건축물의 이미지로 개항기에 서양인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었던 모자가 낙점된 것은 아이러니하다. 그래서 어떤 건축가는 5공 시대의 이 건축물을 두고 “퇴행적”이라고 규정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도심에서 벗어난 ‘섬’ 같은 위치였다.

1981년 9월이었다. 88올림픽 개최 장소로 서울이 결정됐다. 86아시안게임의 서울 개최 결정에 이은 국가적 쾌거였다. 곧바로 예술의전당 건립위원회가 구성됐다. 미국의 링컨센터 같은 한국의 대표적인 예술 공간의 집합체 논의는 그렇게 급물살을 탔다.

1970년대의 경제적 고도 성장기를 지나 먹는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된 80년대라 국민의 문화예술향유 욕구가 생겨나는 시대였다. 정수라가 부른 건전가요처럼 ‘하늘엔 조각구름 떠 있고, 강물엔 유람선이 떠 있는’ 시대였다. 또한, 정부로서는 올림픽 개최 도시로써 대내외에 과시할 문화적 아이콘이 필요했다. 전두환 정권은 80년 개정 헌법을 통해 ‘문화’ 조항을 최초로 명시했다.

문제는 위치였다. 당시의 변두리, 강남이었다. 서울시청 예정용지(현재 대법원 자리)와 현 예술의전당 자리인 서초 꽃마을 두 곳이 최종 후보에 올랐다. 서울시청 예정부지는 토지수용법상 소유 또는 용도변경이 불가능해 서초 꽃마을이 낙점됐다. 1963년 시흥군에서 서울에 편입된 이곳은 허허벌판이었다. 섬이나 마찬가지라는 점은 더 문제였다. 뒤로는 우면산에 막히고, 앞으로는 8차선 남부순환도로가 가로지르며 접근을 막는다. 그래서 우면산 중턱에 걸터앉은 예술의전당은 해자에 둘러싸인 성곽에 비유되기도 한다. 신군부는 치적이 필요했을 뿐, 더 많은 사람이 문화를 향유하려면 어떤 곳에 지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은 없었다. 88올림픽 개최에 맞춰 서둘러 예술의전당을 탄생시키는 게 더 중요했다.
전두환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1988년 2월 15일 예술의전당 음악당 개관 기념 휘호석 제막식이 열리고 있다. 예술의전당 제공

김석철은 위치 선정과 관련해, 이 장관이 자문해왔을 때 한강 고수부지를 적극적으로 제안했다고 한다. 한강에 위치하면 가장 접근하기 쉽고, 모두의 것이 될 수 있는 서울 최고의 문화적 상징물이 될 거라고 했다. 하지만 당시는 올림픽대로도 되어 있지 않았고, 한강도 전혀 정비되지 않은 때였다.

국내 최초의 전용공간 갖춘 복합문화센터

예술의전당은 규모, 용도, 사업비 측면에서 당시 국내 최대 프로젝트였다. 23만1400㎡(7만 평) 부지, 3만 평의 공간에 오페라하우스, 음악당, 미술관, 예술자료관, 예술교육관(서예관으로 변경) 등 5개 건축물을 갖췄다. 공사비는 애초 예정한 600억원에서 1500억원으로 2.5배 증가했다.

이런 기념비적 시설을 당시 만 40세의 김석철이 따낸 것이다. 서울대학교 스승이자 박정희 시대를 대표했던 두 건축가 김수근과 김중업, 그리고 다른 2명의 해외 경쟁자를 제치고 말이다. 그때 김석철은 해외설계수출 1호 격인 쿠웨이트 자하라 신도시 설계를 완성하고, 관악산 서울대학교와 독립기념관 마스터플랜 등을 완성한 건축계의 신인이었다. 따라서 예술의전당 현상공모에 그가 당선된 것은 건축계에서 세대교체를 의미한 사건이기도 했다.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이곳의 음향시설은 롯데콘서트홀이 개관하기 전까지 국내 최고였다.

그는 1986년 가을 예술의전당 설계를 마쳤다. 그리고 88년 2월 15일 음악당이 1차로 개관했다. 88올림픽 개막을 7개월 앞둔 시점이었다. 마침내 92년 12월 오페라하우스 준공을 끝으로 93년 2월 15일 전관 개관 기념 공연을 했다.

여러 비판에도 불구하고 이곳이 국내 최초의 전용 복합문화센터라는 점은 평가해야 한다. 오페라, 콘서트, 연극 등 공연예술 각각의 고유 장르만 공연하는 전문공연장을 갖춘 것이다. 장르마다 무대 구조가 다르고 잔향 시간 등 음향 조건이 다르므로 전용공간은 중요하다. 예술의전당이 개관되기 전까지 국내에는 이른바 다목적홀만 있었다. 세종문화회관(1973), 국립극장(1978)이 그런 곳이었다. 하지만 예술의전당 음악당의 음향시설은 2016년 서울 잠실에 롯데콘서트홀이 생기기 전까지 국내 최고였다.

위치는 벗어날 수 없는 태생의 한계다. 건축비평가 박정현씨는 “외국의 유명 문화시설은 거의 다 도심의 광장, 시청 등 공공 공간 근처에 위치한다. 예술의전당은 우연한 방문이 일어나기 힘든 곳에 있다. 그곳에 가려면 작정을 하고 가야 한다. 우연히 들러보는 사람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예술의전당에서 만들어내는 문화적 에너지가 군불처럼 퍼지지 못해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렇게 한 시대의 결함은 쉽게 보완되지 않는다.

손영옥 미술·문화재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