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생’ 조규성이 온다

입력 2020-05-12 16:06 수정 2020-05-12 16:39
지난해 12월 2일 서울 서대문구 홍은동 그랜드힐튼호텔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K리그 2019 대상 시상식에 올백머리를 하고 나타난 조규성의 모습. 조규성 인스타그램 캡처

‘높이 세우는 코/절대 안 숙이는 목/내 멋 자유/I got no limit(난 한계가 없지).’

지난 1년여 간 대중 앞에 선 조규성(22·전북 현대)의 모습은, 그가 즐겨 듣는다는 힙합 뮤지션 코드 쿤스트의 곡 ‘bronco’ 가사와 꼭 닮았다. 완전 무명이었던 그의 주가가 1년 새 한계를 모르고 올라서다. 일개 대학 축구선수였던 그는 지난해 K리그2 FC 안양의 대표 공격수로 자리매김했고, 올 초엔 태극마크를 달고 득점을 올려 김학범호가 아시아 챔피언이 되는 데 기여했다. 지난 8일엔 K리그1 최강팀 전북의 녹색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2020 시즌 개막전에 ‘무려’ 선발 출전했다. 한국 축구 레전드 이동국(41)을 벤치에 앉히고서다.

가사와 닮은 건 급성장한 커리어뿐만이 아니다. 연말 K리그 대상 시상식에 다소 독특한 정장을 입고 등장한 그의 ‘힙함’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니었다. 끝까지 넘긴 올백 머리에 골반까지 내려오는 흰색 티, 통 넓은 바지를 차려 입은 ‘멋’은 천편일률적인 드레스코드들 속에서 단연 튀었다. 희디흰 얼굴에 노란 머리칼을 휘날리며 여성 팬들을 몰고 다니던 그라운드에서도, 거리의 그래피티나 미술관의 작품들 앞에서 포즈를 취한 인스타그램 속 사진에서도, 조규성의 개성은 흘러 넘친다. “올백 머리에 ‘왁스를 뺏어야 한다’는 반응이 많았어요. 근데, 99명이 욕해도 단 1명이라도 제가 추구하는 스타일을 알아주면 그걸로 만족하는 편이에요.”


미술작품 앞에서 포즈를 취한 조규성(위)과 FC 안양 시절 득점에 성공한 조규성(아래). 조규성 인스타그램 캡처, 한국프로축구연맹 제공

급속한 초년의 성공. 수려한 외모와 넘치는 자신감까지. 색안경을 끼면 그가 자만하거나 콧대만 높은 선수일 거라고 판단하기 쉽다. 하지만 지도자들은 하나같이 조규성의 단단한 내면을 칭찬한다. 광주대 은사인 이승원 감독은 ‘성실 그 자체인 선수’로 그를 기억했다. 김형열 안양 감독도 ‘본인이 무지하게 노력해 어딜 가서도 해낼 수 있는 선수’라고, 수차례 장점을 늘어놨다.

이처럼 다방면에서 돋보일 수 있는 비결은 정립된 본인만의 가치관 덕이다. 조규성은 돈이나 명예 같은 전통적 성공의 가치에 연연하지 않는다. 남이 설정한 기준에 맞추려고 본인을 옥죄지도 않는다. 그가 지금 축구를 하는 건 오직 자기 자신이 행복할 수 있어서다. “저에게 행복이란 지금 이 순간이에요. 전북 이전에 안양에서도, 대학에서도 행복했어요. 돈 많이 벌고 성공하는 게 꿈이고 행복이라고 말하는 분들이 많은데요, 전 꿈을 좇기 위해 달려가는 그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생각해요.”

조규성이 1월 18일 태국 방콕 탐마삿 대학교 훈련장에서 아시아축구연맹(AFC) U-23 챔피언십에 대비해 훈련하고 있다. 한국프로축구연맹 제공

성장 환경은 한 사람의 가치관을 형성한다. 조규성에 영향을 미친 건 독서와 인간관계다. 승려 ‘혜민’의 책들을 거의 대부분 독파하면서는 ‘스트레스를 내려놓는 법’을 배웠다고 한다. 광주대 1학년 땐 테니스 수업에서 래퍼 도빈을 만나 ‘소울메이트’가 됐다. 쇼미더머니를 챙겨보고 가사를 외울 정도로 조규성이 힙합을 좋아했던 데다, 도빈이 태권도 선수 출신이라 서로 공감대가 많았다. “행복에 대한 가치관을 정립하는 데 그 형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만나서 특별한 걸 하는 건 아니에요. 카페에 가서 대화하고 미술관도 가고 하는데 그 시간이 그냥 좋아요. 의지할 만한 인생의 동반자에요.”

전북에서 조규성은 또 한 번 성장하고 있다. 그는 “첫 훈련에서 직접 몸으로 부딪쳐보니 하프라인 위에서 볼 돌리는 레벨이 달라 왜 전북 공격이 ‘닥공’인지 바로 체감했다”고 상기했다. 국가대표 선배들의 움직임과 훈련 태도도 큰 귀감이 된다. “(최)철순이 형 운동량이 너무 많아 ‘나이 들어서 힘들지 않냐’고 물어봤더니 ‘난 똑같은데?’라고 해서 ‘하고자 하는 강한 의지가 있으면 롱런할 수 있구나’ 생각했어요. (이)동국이형은 ‘체력 안배하고 타이밍 맞춰서 뛰어다니라’고 말해주시는데, K리그 탑급의 골대 주변 침착함과 골 결정력을 배우고 싶어요.”

조규성(가운데)가 지난 8일 수원 삼성과의 개막전에서 고승범과 볼을 다투고 있다. 한국프로축구연맹 제공

이동국도 그런 후배를 애정 어린 시선으로 지켜보고 있다. 이동국은 “신체적 조건을 타고났고, 스트라이커로서 해야 할 부분을 잘 알고 있다. 문전 앞의 쓸데없는 움직임만 고친다면 대한민국을 위해 많은 걸 해줄 수 있는 가능성 많은 선수”라면서도 “반짝했다가 사라지는 선수를 너무 많이 봤고, 나조차도 자신감이 자만심으로 변질돼 더 큰 선수가 되지 못했다. 규성이는 지도자들의 조언을 제대로 받아들여 더 발전했으면 좋겠다. 선배로서도 컨트롤해줄 것”이라고 조언했다.

화려한 용모, 준수한 축구실력, 단단한 내면. 여기에 ‘개인의 행복’에 집중하는 ‘90년생’의 시대정신까지. 이동국이 세기말 ‘신세대’를 대변하는 아이콘이 됐던 것처럼, 조규성도 ‘90년생’의 정서를 대표하는 축구선수로 성장할 수 있을까. 2020 K리그1에서 보일 그의 퍼포먼스에 눈길이 가는 이유다.

이동환 기자 hu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