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이 끝이 아니었다… 평생 고생하고도 여전히 노후 불안

입력 2020-05-11 17:16 수정 2020-05-11 17:17

우리 모두 노동과 조직생활 따위에서 해방되는 ‘은퇴’를 꿈꾸지만 퇴직 후라고 팍팍한 삶이나 미래에 대한 불안이 끝나는 건 아니었다. 퇴직자 상당수는 지출을 3분의 1이나 줄이며 허리띠를 졸라맸고, 여전히 노후를 걱정하며 한 달에 100만원 이상 저축하고 있다. 10명 중 6, 7명은 정체성 혼란과 자존감 하락 같은 후유증을 겪는다.

하나금융그룹 100년 행복연구센터가 11일 발간한 ‘대한민국 퇴직자들이 사는 법’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는 이런 실상을 담고 있다. 센터는 지난해 11~12월 수도권과 5대 광역시에 사는 50세 이상이면서 국민연금을 받기 전인 퇴직자 1000명을 조사했다.


퇴직 후 생활비를 줄였다는 응답자는 62.8%였다. 퇴직 전과 비슷하다는 사람은 29.9%로 3명 중 1명에 못 미쳤고, 늘었다는 사람은 7.3%에 불과했다. ‘생활비를 줄였다’는 응답률은 파트타임 재취업 퇴직자가 70.9%로 가장 높고, 창업을 한 퇴직자가 56.4%로 가장 낮았다. 풀타임 취업을 한 이들도 65.6%가 씀씀이를 줄였다. 재취업으로 벌어들이는 소득이 전만 못하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일을 하지 않는 퇴직자는 62.4%가 생활비를 줄였다.

지출을 줄인 퇴직자의 평균 생활비 감축폭은 28.7%였다. 한 달에 300만원을 쓰던 사람이라면 퇴직 후 86만원 정도를 줄인 셈이다. 파트타임 취업자가 30.6%로 허리띠를 가장 단단히 졸라맸고, 풀타임 취업자는 26.7%로 그나마 가장 적게 줄였다. 일을 하지 않는 퇴직자는 29.7%, 창업을 한 퇴직자는 29.0%를 줄였다.


퇴직자의 월 평균 생활비는 251만7000원으로 집계됐다. 창업을 한 퇴직자가 277만8000원으로 가장 많고, 일을 하지 않는 퇴직자가 232만2000원으로 가장 적었다. 월 45만6000원 차이다. 재취업 퇴직자 중에서는 파트타임 취업자(234만6000원)가 풀타임 취업자(267만6000원)보다 월 평균 33만원을 덜 썼다.

조사에 참여한 한 퇴직자는 “(한 달에) 아파트 관리비가 기본적으로 20만~40만원이 나오고 경조사비, 병원비, 보험료, 공과금 같은 게 내가 쓰지 않아도 100만원이 나간다”며 “정부에서 혼자 살면 최저 생계비가 170만원이 든다고 하는데 둘이 그렇게 살면 200만원으로는 그냥 사는 정도”라고 말했다.

다른 응답자는 “(200만~300만원으로) 먹고야 살겠지만 문제는 먹고사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얼마만큼 즐기며 사는지”라며 “옛날처럼 밥 먹고 살고 이런 시대가 아니지 않으냐”고 했다.

연구진은 “퇴직자들의 실제 씀씀이는 그들의 바람과는 차이가 있다”며 “생활비 200만~300만원은 ‘남한테 아쉬운 소리 안하며 먹고 사는 정도’일 뿐 이들은 괜찮은 생활수준을 위해 월 400만원 이상 필요하다고 본다”고 전했다.


정년퇴직 후에도 20~30년을 더 살아야 하는 ‘100세 시대’에 퇴직은 또 한 번의 ‘생존 위기’나 다름없다. 퇴직자 중 노후자금이 충분하다는 사람은 8.2%에 불과했다. 10명 중 6명꼴(66.0%)로 노후자금이 부족하다고 답했다. 반평생을 일해 돈을 벌고도 노후가 불안하다는 얘기다.

퇴직자의 주요 걱정거리(복수응답)는 병원비나 약값 같은 의료비용(71.7%), 가만 둬도 올라가는 물가(62.0%), 자녀 결혼비용(56.2%)이다. 자녀 교육(27.4%)과 부모 부양(20.0%)에 들어가는 돈도 적지 않다.


노후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결국 소비를 줄이거나(63.0%·복수응답) 일을 계속해 돈을 버는 수(54.4%)밖에 없다. 가능한 한 많이 저축하는 것(35.3%)도 필수다. 조사에서는 54.2%가 노후자금 마련을 위해 월 평균 109만5000원을 저축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50만원 이상~100만원 미만(28.2%)과 100만원 이상~150만원 미만(26.2%)이 주를 이뤘다. 200만원 이상 모은다는 퇴직자(18.1%)도 적지 않았다.


퇴직자가 힘든 건 돈 때문만이 아니다. 응답자의 65.4%가 퇴직 후유증을 겪는 것으로 파악됐다. 후유증을 겪는 주요 이유(2개 복수응답)는 ‘가장으로서 생계를 책임지지 못한다는 압박감’(44.8%)과 ‘성취와 사회적 지위에 대한 상실감’(42.7%)이 각각 1, 2위를 차지했다. 가정 내 부적응(28.0%), 자아실현 기쁨과 성취감 감소(27.4%), 조직에서 제외됐다는 소외감(25.2%), 인간관계에 대한 단절감(22.6%)도 퇴직자를 흔들었다.


성별로는 남성(69.6%)이 여성(60.3%)보다 후유증을 겪는 경우가 많았다. 퇴직 후유증을 겪는 가장 큰 이유는 남성이 ‘가장 역할에 대한 압박감’(62.0%), 여성이 ‘성취와 지위에 대한 상실감’(47.4%)으로 차이를 보였다. 연구진은 “55세 이전에 퇴직한 남성은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으로서 압박감을 가장 크게 느꼈다”며 “55세 이후에 퇴직한 남성일수록 생계뿐만 아니라 성취나 사회적 지위에 대한 상실감이 컸다”고 설명했다.


후유증 지속기간은 1개월 미만이 3.4%로 가장 적고 1개월 이상~6개월 미만이 28.3%로 가장 많았다. 이 기간은 6개월 이상~1년 미만 26.3%, 1년 이상~2년 미만 14.2%, 2년 이상~3년 미만 8.4%로 낮아지다 3년 이상에서 19.4%로 다시 높아졌다.

연구진은 “퇴직 후 1년 안에 후유증을 극복하지 못하면 3년 이상 계속 겪을 가능성이 크다”며 “퇴직 후유증을 극복한 뒤에도 2명 중 1명은 가끔 우울과 불안을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전했다.

강창욱 기자 kcw@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