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폰SE 써보니…“애플이 ‘보급형’을 재정의했다”

입력 2020-05-11 06:10

2세대 아이폰SE(이하 아이폰SE)는 독특한 지점에 있다. 가격으로만 보면 ‘보급형’이라는 타이틀을 붙일 수 있지만, 성능은 일반적인 보급형의 정의를 한참 벗어난다. 좋은 의미에서 스마트폰 생태계 교란종이라고 부를 만하다.

이 제품을 기점으로 모든 제조사의 보급형은 사양이 좋아질 수밖에 없게 됐다. 앞으로 보급형 제품은 ‘프리미엄폰에서 몇 가지 기능이 빠진 것’이라고 하기 어려워질 것이다. 반대로 프리미엄 폰이 ‘보급형 제품에서 부가적인 기능이 추가된 것’으로 정의될 것이다. 화제의 중심에 있는 아이폰SE를 사용해봤다.

클래식 디자인, 최신 성능
아이폰SE 사용을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한 행동은 화면을 아래에서 위로 쓸어 올리는 것이다. 아이폰X부터 홈버튼이 사라진 이후 새로운 사용자인터페이스(UI)에서 하던 행동을 무의식중에 했다. 아이폰SE가 아이폰X 이후 애플의 프리미엄 라인업을 사용하는 사용자를 대상으로 하는 제품이 아님이 명확해지는 순간이었다.

아이폰SE는 아이폰8의 외형을 그대로 가져다 쓴다. 후면 애플 로고 위치가 아래쪽으로 내려온 거 말고는 아이폰8과 아이폰SE의 디자인 차이는 없다.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만 최신 제품인 A13 바이오닉을 썼다. 아이폰8 이하 사용자 중에 큰 스마트폰에 거부감이 있는 사용자라면 당연히 아이폰SE로 넘어갈 만하다. 제품 분류상 업그레이드라고 보긴 어렵지만, 분명히 성능 향상은 있다. 아이폰의 게임 성능은 원래 좋은 편인데, 아이폰SE는 아이폰11과 동일한 성능으로 게임을 즐길 수 있다.

카메라는 낮에는 아이폰11과 동일한 수준이고, 밤에는 다소 떨어진다. 카메라 화질을 결정하는 건 이미지 센서 같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처리 능력이다. 아이폰SE는 아이폰8과 동일한 이미지 센서를 사용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A13 바이오닉에 탑재된 이미지 시그널 프로세서(ISP)의 성능이 탁월해 이를 통해 훌륭한 품질의 사진을 만들어 낸다. 단 하드웨어적인 한계로 아이폰11에 도입된 ‘야간모드’는 사용하지 못한다. 같은 이유로 ‘인물모드’도 사람에게만 적용된다. 저조도 환경에서는 아쉽지만 사진 결과물은 매우 훌륭하다.

특히 요즘 사용 빈도가 높아지는 비디오 촬영에서 아이폰SE는 뛰어난 실력을 보인다. 4K 영상 촬영이 가능하고, 다이내믹 레인지도 넓어 영상 품질도 훌륭하다. 사진 촬영을 하다가 버튼만 길게 누르고 있으면 동영상을 찍을 수 있는 ‘퀵테이크’ 기능도 포함돼 있다.

아이폰SE는 전·후면에 카메라가 하나씩 있다. 보급형에도 3~4개씩 카메라를 탑재하는 안드로이드 진영에 비하면 양적 열세다. 하지만 ‘똘똘한 하나’가 ‘애매한 여럿’보다 훨씬 만족스러운 사진과 동영상 촬영이 가능하다는 걸 아이폰SE는 증명하고 있다.

작은 화면, 배터리는 약점
아이폰SE의 단점을 굳이 꼽자면 요즘 폰치고는 작은 4.7형의 디스플레이와 배터리다. 아이폰8 디자인을 그대로 가져오느라 디스플레이와 배터리는 손을 댈 여지가 전혀 없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아이폰SE를 보여줬을 때 돌아오는 첫 번째 대답은 한결같이 “화면이 너무 작다”였다. 다들 6인치 이상의 스마트폰을 쓰고 있기 때문에 아이폰SE가 작아 보인 것이다. 화면 크기는 스마트폰 선택에 중요한 요소다. 때문에 4.7형 화면은 아이폰SE가 외연을 확대하는 데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배터리 사용 시간은 이해할만한 수준이다. 애플은 배터리 사양을 공개하지 않는 데 사용 시간에서 아이폰8과 비슷하다고 밝히고 있다. 비교 대상이 아이폰11이라면 배터리 사용시간이 짧다고 할 수 있지만, 다른 안드로이드폰과 비교하면 짧지 않다.

아쉬운 건 애플이 5W 충전기를 제공한다는 점이다. 아이폰SE는 고속 충전을 지원한다. 18W짜리 충전기를 사용하면 30분 만에 50%까지 충전할 수 있다. 아이폰SE의 출고가를 고려하면 고속충전기를 기본으로 제공하지 않는 게 수긍은 가지만, 아쉬운 건 어쩔 수 없다.

애플의 노림수는 생태계 확대
아이폰SE는 팀 쿡 체제의 애플이기에 나올 수 있는 제품이다. 쿡은 고 스티브 잡스가 애플 최고경영자일 때 재고관리 등 운영에서 탁월한 노하우를 갖춘 인물로 평가받아 중용됐다. 아이폰SE는 기존에 보유하고 있는 부품 재고를 소진하기 위해 만든 측면이 있다. 2016년 출시된 1세대 아이폰SE는 아이폰5S를 바탕으로 만들었고, 이번에는 아이폰8을 가져다 썼다.

주목할 점은 애플의 가격 정책이다. 그동안 애플은 가격만큼은 늘 고자세를 유지해왔다. 애플 스마트폰에 ‘가성비’라는 수식어가 붙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이는 애플의 전략이 바뀌었음을 시사한다. 그동안 아이폰 판매를 통해 높은 마진을 챙겼다면, 이제는 보급형 시장에서 기기 보급을 확대해 생태계를 키우겠다는 의도다.

애플은 애플TV, 애플아케이드 등을 선보이며 ‘서비스 기업’으로 체질 개선을 시도 중이다. 실적발표 때마다 서비스 부문 매출은 최고치를 갈아치우고 있다.

하지만 스마트폰 시장은 포화상태다. 아이폰 사용자들도 2~3년에 한 번꼴로 기기를 교체할 뿐 새로운 사용자 유입은 정체된 상황이다.

아이폰SE는 최근 스마트폰이 너무 크다고 느끼는 아이폰8 이하 애플 기기 사용자들 그리고 안드로이드 진영의 보급형 기기 사용자를 정면으로 겨냥한다.

인도, 중국 그리고 동남아시아 등 시장은 크지만, 중저가 제품 위주인 곳에서 아이폰SE는 큰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 이런 시장은 아이폰에 대한 수요는 있지만, 가격이 장벽으로 작용해왔기 때문이다.

애플은 아이폰SE를 통해 안드로이드 보급형 시장을 빼앗아오고, 애플 생태계를 더욱 확대할 것으로 예상한다.

김준엽 기자 snoop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