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자존심 싸움에 ‘코로나 공조’ 유엔결의안도 무산

입력 2020-05-10 16:07 수정 2020-05-10 16:18

코로나19 대응 공조를 위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결의안이 세계 최강대국 미국과 중국의 자존심 싸움 속에 끝내 무산됐다.

9일(현지시간) CNN방송 등에 따르면 미국 정부는 전날 코로나19 대응에 집중하기 위해 전 세계가 모든 분쟁을 중단하고 잠정 휴전에 돌입하자는 내용의 안보리 결의안 통과를 막았다. 미국은 세계보건기구(WHO)가 ‘중국 편향적’이라며 결의안에 WHO가 어떤 식으로든 언급돼서는 안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복수의 외교 소식통은 CNN에 “미국은 결의안에 ‘보건 분야에 특화된 유엔 산하 기구’라는 용어를 쓰는 방안조차 반대했다”고 전했다. WHO에 대한 간접적 언급이 실리는 일조차 거부한 것이다.

중국 역시 결의안에 WHO를 중심으로 전 세계가 뭉쳐야 한다는 표현이 필수적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입장을 고집하며 미국에 날을 세웠다. 지난 2017년 에티오피아 출신 테드로스 아드하놈 게브레예수스 WHO 사무총장이 유럽 후보를 꺾고 당선된 배경에는 중국 정부의 전폭적 지원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할 수 밖에 없는 구조다.

결국 결의안 갈등은 WHO를 통해 팬데믹 대응을 주도하려는 중국과 이를 거부하며 자국 중심의 새 판을 짜려했던 미국의 신경전이었던 셈이다. 누가 더 큰 국제적 영향력을 가져갈 것인가를 둘러싼 G2의 다툼 속에 6주 넘게 이어져온 국제공조 논의가 망가졌다. 안보리의 한 외교관은 “결의안 논의가 문제의 본질과는 상관없는 부수적인 것들에 인질로 잡히면서 미·중 다툼으로 변질됐다”며 “우리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고 개탄했다.

국제 리더 자리를 둘러싼 미·중 갈등은 결의안 결렬 이후에도 더 격화될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오는 11일부터 중국 출신 언론인들의 비자 발급 기준을 무기한에서 90일짜리로 제한하기로 결정했다.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는 10일 ‘미국의 거짓말과 진상’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2개 면을 할애해 보도했다.

CNN은 코로나19에 따른 국제적 위기에도 미국이 리더십을 내던진 채 중국과 각을 세우는 데만 열중하면서 동맹국들도 절망감을 느끼고 있다고 전했다. 다수의 국가들이 코로나19 대응만으로도 바쁜데 미·중 양국의 눈치까지 살펴야하는 상황으로 내몰렸다는 것이다.

프랑스 출신 외교관은 CNN에 “우리는 중국에 등을 돌릴 수 없다. 중국은 중요한 국제 파트너고 어떤 나라도 그렇게 하지 못할 것”이라며 미·중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미국의 행보를 비판했다. 독일 출신의 외교관도 “모든 것이 정치적이라 우려된다”며 “(도널드 트럼프) 재선 캠페인의 일환이라는 게 분명하다”고 지적했다.

이형민 기자 gilel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