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2년 어느 미친 여름날, 미국 매사추세츠주의 작은 도시 폴 리버 보든 가의 사업가 앤드류 부부가 집에서 살해된 채 발견된다. 흉기는 도끼. 유력 용의자로 둘째 딸 리지가 지목됐다. 사람들은 쑥덕였다. ‘여자가 감히 남자를…’. 세기의 재판이 열렸다. 반론을 위해 재판장에 선 보든 가의 메이드 브리짓은 가부장적 논리를 정면으로 받아치며 무죄를 받아냈다.
“그렇잖아요, 어떻게 여자가 감히 어떻게 남자를 죽이겠어요(웃음). 제 대사는 실제로 재판장에서 검사가 한 말이래요. ‘딸이 감히 아빠를 살해할 수 있느냐’고 호통 쳤다더라고요. 역이용해서 ‘에이~ 설마 아빠를 죽였겠어요’하며 무죄를 검사 스스로 입증하도록 했죠”
최근 서울 대학로 인근에서 국내 신작 라이선스 뮤지컬 ‘리지’에서 브리짓을 연기한 배우 최현선을 만났다. 그가 이 작품을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등장인물이다. 딱 여성 4명. “캐스팅 제안을 받고 ‘안 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고 생각했어요. 이런 캐스팅은 처음이었거든요. 여자 4명이 탈코르셋을 하는데 진짜 통쾌했어요(웃음).”
최현선은 “지금까지 여성만 오르는 무대는 드물었지만 자신 있었다”며 “좋은 여성 배우가 정말 많은데 설 무대가 없다”고 씁쓸해 했다. 그는 오직 여성들만 무대에 올라 여성의 연대를 외치는 공연이라는 점에 큰 의의를 두면서 이번 작품을 계기로 여성 배우의 자리가 확장되기를 바라고 있다. “남성 배우만 나오는 공연은 많지만 누구도 특이하다고 여기진 않았어요. 여성 배우 4명만 나온다고 하니 신기하다고 놀라더라고요. 오히려 그게 신기했어요. 남성만으로 구성된 공연있다면, 여성만 나오는 공연이 있는 건 당연한 것 아닐까요?”.
극 중 인물 4명은 늘 함께였다. 특히 리지와 엠마가 반전을 꾀할 때마다 브리짓은 늘 곁에 있었다. 최현선은 “인생 자체가 비극이었을 자매의 아픔에 감정적으로 동요됐다”고 말했다. 은근슬쩍 동선을 흘리는 등 소극적이었던 1막에 비해 2막에서는 피 묻은 드레스를 없애는 등 대담해졌다. 최현선은 “2막부터는 ‘정당한 일을 했다’는 믿음이 생긴 것 같다”며 “보여 지는 것에 개의치 않기로 한 뒤 옷을 벗어 던졌다”고 설명했다. ‘옷을 벗어 던지는’ 행위는 이 작품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극 중 여성들의 변화는 외형적으로 섬세하게 표현됐다. 1막에서는 1800년대 후반 중세풍 드레스를 입었지마 2막이 오르자 파격적으로 변했다. 치렁치렁한 드레스를 벗어던지고 머리를 풀어헤쳤다. 이들의 탈코르셋은 속박됐던 삶에서 주도권을 쥔 한명의 인간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장치였다.
‘록뮤지컬’이라는 장르는 독보적 성량의 최강자로 꼽히는 최현선에게 딱 맞는 옷이었다. 웅장하고 경쾌한 록음악과 화려한 퍼포먼스는 억눌렸던 시대적 관습을 깨는 것 같은 짜릿한 카타르시스를 선사했다. 최현선은 “여성 4명이 무대에서 2시간 동안 소리 지르는 공연, 흥미롭지 않나”라고 말했다.
다만 관객은 조용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예방을 위해 공연장 내에서는 함성을 지를 수 없었다. 최현선은 “같이 소리 지르고 싶고, 함께 울고도 싶었지만 눈빛으로 전해지는 힘도 그에 못지않다”고 전했다.
뮤지컬은 운명 같았다. 체고 입시를 준비하다 부상을 입었을 때 최현선은 노래와 무대를 떠올렸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순간을 사랑했다. “뮤지컬은 제가 제일 잘 할 수 있는 분야예요. 모든 기회에 최선을 다하겠지만 음악에 대한 열정은 끝까지 안고 가려고 해요. 무대라는 건 참 신기해요”. 목소리에 애정이 묻어났다. 무대를 마치고 항상 되뇌는 말이 있다. 요즘에는 출연 배우 4명이 함께 손을 맞잡고 외친다. “오늘도 해냈다”. 그가 생각하는 ‘여성의 연대’는 이런 게 아닐까.
박민지 기자 pm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