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 이동련 할머니가 간암 투병 끝에 91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대법원에서 최종 승소 판결을 받았지만 끝내 전범기업인 미쓰비시로부터 어떤 사과와 배상도 받지 못한 채 숨을 거뒀다.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은 일본 전범기업인 미쓰비시중공업의 강제동원 피해자 이동련 할머니가 전날 밤 11시10분쯤 지병으로 별세했다고 7일 밝혔다. 이 할머니는 간암으로 요양병원에서 투병 생활을 해왔다.
1930년생인 이 할머니는 전남 나주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인 교장에게 속아 14살이던 1944년 5월 양금덕 할머니 등과 함께 미쓰비시중공업 나고야 항공기제작소로 동원됐다.
이 할머니는 비행기 부속품에 페인트칠을 하는 강제 노역에 시달렸으나 월급은 단 한 푼도 받지 못했다. 그는 강제동원 7개월 만이던 1944년 12월 발생한 도난카이 대지진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지만 함께 동원됐던 동료들의 죽음을 목격하는 비극을 겪었다.
1945년 10월쯤 고향으로 돌아온 이 할머니는 근로정신대 피해자에 대한 사회적 시선에 괴로움을 느껴 피해 사실을 숨겼다. 이후 일본 내 양심세력의 소송 지원에 용기를 내 1999년 3월1일 일본 정부와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나고야지방재판소에 소송을 제기했다.
이 할머니는 10년간 법정 투쟁을 벌였으나 2008년 11월11일 일본 최고재판소에서 끝내 패소했다. 그러나 시민모임 등의 소송 지원에 힘입어 2012년 10월24일 광주지방법원에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다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고 2018년 11월29일 마침내 우리나라 대법원에서 최종 승소했다.
오래전부터 간암으로 요양병원 생활을 해 오던 이 할머니는 최종 승소 당시에도 건강이 좋지 않아 안타깝게도 재판을 직접 지켜보지는 못했다. 그는 일본 정부와 미쓰비시로부터 사죄 한마디 듣고 싶다고 소원했지만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얼굴이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했던 이 할머니는 평소 언론 인터뷰를 사양하고 항상 마스크를 쓰고 다녔다. 그러나 한국에서 소송이 시작된 이후부터는 일본 정부와 미쓰비시의 잘못을 알리는 공개적인 자리에 참여하며 근로정신대 피해자들의 명예회복을 위해 활동해왔다.
대법원의 승소 판결에도 지금까지 미쓰비시중공업과 일본 정부는 1년6개월째 판결 이행을 거부하고 있다. 그러는 사이 지난해 1월25일 원고 5명 중 한 명인 김중곤 할아버지도 작고한 데 이어 고인까지 생을 마감하게 됐다.
이화랑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