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출했는데…” 세대주 재난지원금 독식에 별거 가정 ‘한숨’

입력 2020-05-08 00:08 수정 2020-05-08 00:08
서울 종로구의 한 쪽방촌에 배포된 긴급재난지원금(재난지원금) 안내문이다. 연합뉴스

“두 아들 내가 키우는데…”

“긴급재난지원금(재난지원금)을 받으실 수 없습니다.”

건설현장을 다니면서 홀로 두 명의 자녀를 돌보는 일용직 A씨(35)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일감이 줄면서 당장 한달 생활비도 마련하기 어려워진 A씨에게 재난지원금은 절실했다.

현재 A씨는 초등학교 2학년, 중학교 2학년인 두 아들을 지난 2월부터 홀로 돌보고 있다. 지난해 이혼 소장을 접수한 그의 아내 B씨는 초등학교 4학년인 딸과 함께 집을 나간 뒤 연락조차 닿지 않는다.

하지만 A씨는 재난지원금을 신청할 수 없다. 지원금 신청 및 수령 자격은 세대주 혹은 세대주가 인정한 대리 구성원에게 있는데 주민등록등본에 등록된 세대주는 잠적한 부인 B씨이다. A씨는 “아이들 양육비, 주택 대출 등을 월급으로 간신히 메꿔왔다”면서 “부족한 생활비를 메우려고 가입한 보험을 담보로 한 달에 30만원 정도 빌려 쓰며 버티고 있다”고 말했다.

설상가상으로 A씨는 3주 무급휴가를 내야 했다. 초등학교 2학년 아들이 한글을 떼지 못해 온라인 수업 공부를 도와줘야 하기 때문이다. A씨는 “키워야 하는 아이들도 있는데 나머지 가족은 어떻게 되는 거냐”고 한탄했다. 잠적한 B씨는 양육비도 지원하지 않고 있다. 만약 B씨가 오는 11일부터 시작되는 재난지원금 지급신청을 하면 A씨와 두 아이에게 돌아올 몫은 없다.

고민하던 A씨는 보건복지부와 행정안전부 등 여기저기 전화를 걸었지만 “세부 지침이 없다” “추후 공지하겠다” “우리 소관이 아니다”라는 답변을 받았다. A씨는 마지막으로 읍·면·동 주민센터에 전화를 걸었지만 “현행 제도상 세대주가 재난지원금을 독점해도 이의 신청할 방법이 없다”는 답을 들었다며 한숨 쉬었다.

건강보험 기준? 주민등록 기준? 이혼 가정들 ‘혼란’

이미 이혼한 가정도 난감하기는 마찬가지다. 남편과 이혼 후 자녀들을 홀로 돌보고 있는 C씨(37)는 “재난지원금 사이트에서 지급조회를 해보니 1인 가구로 떴다”며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C씨가 1인 가구로 분류된 것은 자녀들의 건강보험료를 전남편이 내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국민건강보험법상 피부양자로 등록된 배우자와 자녀는 주민등록등본상 세대가 분리돼 있어도 재난지원금을 받을 때 같은 세대로 간주된다. 이에 따라 C씨는 두 자녀를 돌보고 있음에도 1인가구로 분류돼 3인 가구 기준 재난지원금인 80만원의 절반인 40만원 밖에 받지 못한다.

C씨의 문의전화에 주민센터는 “이의신청을 하면 18일 이후에 구성원 조정이 이뤄진다”고 답했다. 하지만 C씨는 “재난지원금 지급은 11일부터 시작되는데, 전남편이 미리 받아가면 어떡하냐”며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청와대 국민청원 홈페이지 캡처

1인가구 시대라면서 세대주 독식

정부가 지난 4일 전국 2171만세대를 대상으로 재난지원금 지급을 개시하면서 신청 주체를 각 세대주로 한정하자 이혼 혹은 이혼 준비로 별거 중인 가정들이 불편함을 호소하고 있다. 행정안전부가 3일 공개한 긴급재난지원금 지급방식에 따르면 지원금을 온·오프라인으로 신청할 수 있는 자격은 세대주 및 세대주로부터 위임장을 받은 세대 구성원으로 제한된다.

세대주 외 구성원이 재난지원금을 신청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요청은 청와대 국민청원에도 등장했다. 관련 내용으로 진행 중인 3건의 청원내용을 보면 “세대주가 중환자이거나 실종·가출, 원양어선 출항 등으로 연락두절된 경우 어찌하나” “이혼·별거 가정의 세대원도 신청할 수 있도록 해달라” “세대원 각자 받을 수 있도록 하자”는 요구가 담겨 있다.

세대별 지원은 사회변화에도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전문가들은 복지의 수혜 단위를 세대에서 개인으로 바꿔야 한다고 조언한다. 혼인 가정을 기본값으로 설정하고 세대주에게 혜택을 몰아주는 지금의 복지 운영은 급속한 가족 해체, 1인가구 증가 등 시대적 흐름에도 맞지 않으며, 세대주가 독점한 지원금이 다른 구성원들을 위해 사용될지 알 수 없어 복지 효용이 크게 떨어진다는 비판이다.

윤홍식 인하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세대주가 복지 혜택을 독식했을 때 아이 등 다른 구성원의 필요에 맞게 사용하는지 불확실하다는 것이 학계의 연구결과”라고 설명했다. 또한 “세상은 가족보다는 개인 단위로 변화하고 있다”면서 “정부가 관성적으로 가부장을 중심으로 한 전통적인 가족 단위로 지원금을 지급하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미국, 유럽 등 대부분 서구 국가들은 개인 단위로 복지지원금을 지급하고 있으며 세대 내지 가구 단위로 지원하는 나라는 한국, 일본 등 소수의 아시아권 국가밖에 없다고 윤 교수는 덧붙였다.

조흥식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도 “재난지원금을 신청받을 때 이혼, 가정폭력 등의 이유로 별거하는지 여부를 조사하거나, 세대주에게 일단 몰아주더라도 나머지 가족들이 구상권을 청구할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며 “이번 재난지원금 문제를 보면 복지의 수급 기준을 개인으로 바꿔야 할 필요성이 더욱 커졌음을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성훈 기자 tellme@kmib.co.kr
김유진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