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디지털성범죄자 되지 않는 법’ 등 초등 교과서에 실린다

입력 2020-05-06 18:02 수정 2020-05-06 20:00
전국교육대학생연합이 지난달 2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텔레그램 N번방 가해자 엄중 처벌 및 교육계의 성인지 감수성 제고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개최하고 있다. 연합뉴스

디지털 성범죄 관련 성교육 내용이 추가된 초등학교 보건 교과서가 처음 도입된다. ‘n번방 사건’ 가해자 상당수가 10대인 상황에서 그동안 청소년의 성인식 변화를 전혀 따라가지 못하고 있던 학교 성교육 현장의 변화가 기대된다.

국민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7일 사단법인 보건교육포럼이 수정한 초등학교 5, 6학년 ‘생활 속의 보건’ 교과서에 대한 승인을 경기도교육청에 신청할 계획이며, 도교육청은 이에 대한 심사에 들어갈 예정이다. 새 교과서가 승인되면 내년부터 경기도를 비롯한 전국의 교육 현장에서 수정된 교과서를 사용할 수 있게 된다. 2009년 이후 10여년 만에 초등학교 보건 교과서가 수정되는 것이다. 도교육청 관계자는 6일 “보건 교과가 현재 정식과목은 아니지만 교과서 수정 승인 요청이 들어오면 적절한지 심사할 예정”이라며 “심사에 통상 2~3개월 정도 소요된다”고 설명했다.

국민일보가 입수한 교과서 수정본의 성교육 관련 단원에는 그루밍과 사이버(디지털) 성폭력 관련 내용이 대폭 새로 추가됐다. 초등학교 6학년 보건 교과서 ‘성폭력 함께 예방하기’ 단원에는 그동안 없었던 디지털 성범죄 관련 내용이 추가됐는데 “사이버 공간에서의 성적인 괴롭힘과 불법촬영물 유포·협박, 불법촬영, SNS를 통한 불법촬영물 공유 등이 디지털 성폭력이 될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피해 예방 뿐 아니라 가해 행위가 처벌 대상이라는 사실도 분명히 한 것이다.

또 최근 ‘n번방’과 ‘박사방’ 등에서 미성년자 성착취 방식으로 논란이 된 ‘그루밍’에 대해서도 상세히 다뤘다. 수정본에서는 “(그루밍은) 온라인 대화를 이용해 친절을 베풀며 호감과 신뢰를 쌓은 뒤 성적인 대화를 하거나 신체 사진영상을 요구해 성폭력을 하기 위한 협박의 도구로 활용하는 행동 전체를 말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학생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카카오톡 대화처럼 온라인 그루밍 사건을 구성하기도 했다.

또 타인의 개인정보를 동의 없이 전달해서도 안되고, 촬영된 사람의 허가 없이 사진이나 영상을 게시하거나 유포하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도 분명하게 적시했다. 특히 불법 촬영에 대해서는 “촬영 자체 만으로 범죄가 될 수 있다”며 “불법촬영물은 저장하거나 공유하는 것 뿐 아니라 클릭조차 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아동·청소년이 자신도 모르게 저지를 수 있는 성폭력 가해 방지를 위해 ‘경계 존중’에 관련된 내용도 추가됐다. 초등학교 5학년 교과서 수정본에는 “경계란 안전을 위한 최소한의 장치이므로 다른 사람의 경계를 함부로 넘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어 “여러 활동을 통해 다른 사람의 경계에 들어갈 때는 반드시 동의를 구해야 한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보건교사포럼 관계자는 “그간 청소년 대상 성교육에서는 성범죄 피해자가 되지 않도록 조심하자는 내용 위주로 교육했다”며 “가해자가 되지 않도록 적극적으로 방지하는 교육은 부족하다는 점이 계속 지적돼 왔다”고 설명했다.

수정본 저술에 참여한 우옥영 경기대학교 교육대학원 교수는 “보건 교과서가 종전 교육과정(2009년) 때 출간된 상태에 머물러 있었던 탓에 보건교육의 한 부분인 성교육 관련 내용도 오랫동안 뒤떨어져 있던 것이 사실”이라며 “지금 아이들이 그 어떤 세대보다 디지털 기기와 친숙한 만큼 관련 교육도 최신 내용을 반영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성교육 내용이 포함된 초등학교 보건 교과서가 10여년 만에 수정되는 이유는 현행(2015년) 교육과정에 보건 교과가 없었기 때문이다. 과거 교육과정에는 보건 교과가 있었지만, 2015년 삭제되면서 굳이 현행 교육과정에 맞춰 수정할 필요성이 없었다는 얘기다. 이 때문에 보건 교과서는 다른 과목의 보충을 위한 인정도서로만 사용돼 왔고, 교육 현장에서는 기존의 보건 교과서를 쓰거나 교사가 별도의 학습자료를 만들어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경기도를 제외한 다른 시·도교육청에서는 아직 초등학교 보건 교과서를 수정하려는 움직임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시교육청 관계자는 “보건은 정식교과가 아니기 때문에 교과서를 현행 교육과정에 맞게 수정할 의무는 없는 상황”이라며 “아직 보건 교과서를 적극적으로 수정할 계획은 없다”고 말했다. 교육부 관계자도 “인정도서 승인은 각 시·도교육청에 권한이 있다”면서도 “하나의 시·도교육청에서 인정도서로 승인되면 다른 시도에서도 별도의 절차 없이 사용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김지애 기자 amor@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