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 삼각별, 뒤로는 배신’ 벤츠 등 4만대 배출가스 조작

입력 2020-05-06 17:01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6일 환경부 조사에서 배기가스 불법조작으로 적발된 벤츠 C200d, 벤츠 GLC250 d 4Matic, 닛산 캐시카이, 포르쉐 마칸S 디젤.

벤츠는 국내에서 매년 수입차 판매량 1위를 기록하고 있다. 선망의 대상이자 부의 상징으로 여겨져 왔다. 그런데 배출가스를 불법 조작한 사실이 들통났다. 미세먼지 원인 물질이 인증기준보다 최대 13배에 달했고, 역대 최대 과징금인 776억원을 부과받게 됐다. 업체의 도덕적 해이와 정부의 허술한 인증체계가 만들어낸 합작품이라는 지적이다.

환경부는 메르세데스-벤츠코리아(벤츠)·한국닛산(닛산)·포르쉐코리아(포르쉐)가 국내에서 판매한 경유차 14종(4만381대)에서 배출가스 불법 조작이 있었다고 판단하고, 인증취소·결함시정(리콜) 명령·과징금 부과·형사고발 조치한다고 6일 밝혔다.

이들 경유차는 2012년부터 2018년까지 판매된 모델이다. 환경부는 인증시험 때와는 달리 도로주행 시 질소산화물 환원촉매장치(SCR)의 요소수 사용량이 줄어들고 배출가스 재순환장치(EGR) 작동이 중단되는 등 불법조작 프로그램 적용 사실을 확인했다. SCR은 배기관에 요소수를 공급해 미세먼지 원인 물질인 질소산화물을 물과 질소로 바꿔주는 장치다. 불법조작으로 확인된 질소산화물 배출량은 실내 인증기준(0.08g/㎞)의 최대 13배를 웃돌았다.

벤츠의 경우 C220d·GLC220d 4Matic 등 12종(3만7154대) 차량에서 불법조작이 드러났다. 벤츠는 2018년에도 독일에서 경유차의 요소수를 제어하는 불법 소프트웨어를 심었다가 리콜 명령을 받았다. 닛산과 포르쉐가 불법 조작한 차종은 각각 캐시카이 1종(2293대), 마칸S 디젤 1종(934대)이다. 닛산은 차량 엔진에 들어오는 공기 온도가 35도를 넘으면 SCR 가동이 중단되도록 조작했다. 포르쉐는 엔진 시동 이후 20분이 경과한 시점부터 SCR 가동률을 떨어뜨리는 꼼수를 부렸다.

환경부는 3개 수입차 업체에 역대 최대 규모인 약 800억원의 과징금을 부과하기로 했다. 벤츠는 776억원, 닛산은 9억원, 포르쉐는 10억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했다. 또 이달 중으로 14종 차량에 대한 배출가스 인증을 취소하고 이미 판매한 차량은 리콜 명령할 방침이다. 형사고발도 병행한다. 리콜 명령을 받은 수입사는 45일 이내에 환경부에 결함시정계획서를 제출해 승인을 받아야 한다. 리콜은 이후부터 실시할 수 있다.

국내에서 수입차 배출가스 불법조작이 처음 적발된 건 2015년 11월이다. 당시 아우디·폭스바겐은 티구안 등 12개 차종(12만5000여대)을 조작해 과징금 141억원을 물었다. 올해까지 총 7차례의 불법조작이 적발됐으며 차종과 판매량은 각각 46종, 14만4000여대에 달한다. 인증취소, 리콜명령, 형사고발 등 모두 같은 조치가 취해졌다. 그런데도 아우디와 포르쉐, 폭스바겐은 2~3번 이상 불법조작을 지속하다 적발되기도 했다. 벤츠의 배출가스 불법 조작이 국내에서 적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인증 땐 멀쩡했던 차량이 도로 위만 달리면 배출가스 조작문제를 일으킨 데에는 정부의 ‘허술한 인증체계’가 한몫했다. 국내 배출가스 인증시험은 환경부 산하 국립환경과학원에서 지정한 6곳에서 대행한다.

이번에 적발된 수입차의 배출가스 인증시험은 20분에 불과했다. 실내에서 제조사가 제출한 차량으로 20분간 달리면서 배출가스량을 테스트하는 ‘유럽연비측정방식(NEDC)’이었다. 수입차 업체는 이 점을 악용했다. 20분 동안에는 EGR·SCR 장치가 제대로 작동하도록 설계하고, 이후부터는 배출가스가 늘어나도록 조작했다. 20분만 버티면 쉽게 인증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와 관련 환경부는 2017년 10월부터 인증 기준을 대폭 강화한 국제표준시험방식(WLPT)으로 전환해 현재 임의조작 프로그램 설치 등 불법행위는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단언했다. 시장에서 판매 중인 수입차는 WLPT를 통과했기 때문에 불법조작 프로그램 적용 가능성이 ‘0%’에 가깝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수입차의 불법조작 수법이 갈수록 지능화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 경계심을 늦춰선 안 된다고 지적했다. 처벌 규정도 세계 수준에 버금가도록 강화해야 한다는 의견도 제시했다.

김필수 대림대 자동차학과 교수는 “EGR 조작에 그쳤던 불법조작 수법이 올해는 요소수 분사를 조정하는 식으로 진화하는 등 갈수록 교묘해지고 있기 때문에 정부의 관리·감독이 느슨해져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세종=최재필 기자 jpcho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