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은 목사
서울 마라나타 교회
본문 : 요한복음 10 장 1~21절
양의 우리로 들어가는 규칙이 있습니다. 문을 통하여 들어가야 합니다. 문이 있는데 문으로 들어 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가면 반칙입니다.
그렇게 양의 우리로 들어오는 자들은 정상적이지 않습니다. 양을 도둑질해서 죽이려는 절도요, 강도입니다.
문으로 들어가는 자는 양의 목자입니다. 목자는 양을 사랑합니다. 문지기가 문을 열어주면 양이 우리로 들어오는 것을 보십시오.
목자가 양의 이름을 각각 하나씩 부르면 양은 자기를 부르는 그 음성을 알아 듣고 문으로 들어옵니다. 양은 자기 이름을 부르는 목자의 음성을 듣고 그 말을 알아듣습니다. 자기의 목자이기 때문입니다.
양은 절도 강도의 낯선 음성은 듣지 않습니다. 자기가 모르는 낯선 타인이 부르면 따라가지 않고 도망갑니다.
절도 강도는 양을 도둑질해서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반칙을 써서 문이 아닌 다른 곳으로 넘어서 들어오지만 예수님은 자기양에게 생명을 얻게 하는데 풍성하게 더 풍성하게 얻게 하려고 오십니다.
목자는 그 많은 양들의 이름을 어떻게 하나씩 불러서 들여보낼까요? 양이 비슷비슷해서 그 양이 그 양인 것 같이 구분이 안되지만 목자는 그 많은 양들을 하나하나 다 알고 있습니다. 자기 양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양의 문입니다.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양은 우리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또 양의 선한 목자이십니다.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립니다. 목숨 걸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선한 목자가 양을 어떻게 대하는 지를 알려면 삯군이 양을 대하는 태도와 비교해 보면 더 잘 알게 됩니다. 선한 목자와 삯군은 양을 대하는 태도가 다릅니다.
사나운 이리가 나타나면 삯군은 양을 버리고 도망갑니다, 이리가 양을 물어뜯고 잡아채서 양이 도망가서 흩어져 생사를 확인 할 수 없어도 삯군은 그냥 가버립니다. 삯군이 그렇게 무책임한 이유는 그 양이 자기 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삯군은 양이 자기에게는 귀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죽던 말건 개의치 않습니다. 돈벌이를 하려고 파트 타임으로 잠깐 돌보는 양을 위해서 위험 할 때 자기가 다치면서 까지 양을 지키지 않겠지요, 그냥 버리고 가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목자는 다릅니다. 양을 각각 그 이름까지 다 알고 하나하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목자가 양을 아는 것처럼 양도 목자를 알고 있습니다. 서로 소통하고 교감하면서 하나되어 사랑하는 깊고 진한 관계입니다.
그 관계 안에서 예수님은 자발적으로 양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내어주신 것입니다. 양들은 이런 목자가 있습니다. 양들은 목자의 음성만 듣고 따라가면서 우리 안에 있으면 문제 없습니다.
풍성하고 더 풍성하게 생명을 누리면서 살게 됩니다. 이렇게 진리가 선포되니 유대인들 사이에 또 분쟁이 일어납니다. 진리 앞에서는 호 불호가 나누입니다.
진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고 환호를 받지 않습니다. 진리는 받지 않는 사람들에게 판단을 받게 됩니다. 따르는 자들에게는 생명의 길이지만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핍박을 받게 됩니다.
진리니까 그렇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길은 늘 논쟁하느라 시끄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