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에 치명적’…특효약 ‘헛된 꿈’ 접어
트럼프, 언론 비판 못 견뎌…참모들에 분노 폭발
“실업률 15% 넘으면 대선 진다” 참모들 경고
애리조나 마스크공장 5일 방문…경제정상화 시동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 3월 29일부터 5월 1일 오후 5시까지 백악관에만 머물렀다. 무려 34일 동안이었다.
트럼프 대통령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를 피해 사실상 자가금지와 같은 외출금지를 겪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미국민에게 ‘사회적 거리두기’를 당부했으니 외출금지를 피할 명분도 없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1일 오후 대통령 전용별장인 메릴랜드주 캠프 데이비드로 떠나며 비로소 백악관에서 벗어났다.
워싱턴포스트(WP)는 ‘34일 간의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미국 재개방을 위한 트럼프의 필사적 노력’이라는 제목으로 백악관 내에서 감춰졌던 그의 모습을 2일(현지시간) 보도했다. WP는 이 기사를 위해 트럼프 행정부 당국자들, 외부 참모와 전문가 등 82명을 인터뷰했다고 전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의 재임 기간 중 많은 사망자가 나올 것을 걱정했다. 그러나 외출금지 시간이 지날수록 본심이 드러났다. 그는 코로나19 대처보다 이른 경제 정상화에 더 매달렸다.
헛된 치료제가 코로나19 특효약이 될 것이라는 헛된 기대도 품었다. 참모들에게 화를 많이 냈으며 언론에 집착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자가격리 34일은 올해 11월 3일 실시될 미국 대선에 대한 강박관념으로 요약된다.
심장에 치명적인 말라리아 치료제, ‘특효약’ 기대
트럼프는 말라리아 치료제에 꽂혔다. 이름도 길다. 하이드록시클로로퀸이다. 그는 이 치료제가 코로나19를 한방에 없애줄 ‘게임 체인저(판도를 바꾸는 것)’라고 믿었다.
트럼프가 하이드록시클로로퀸 집착에 빠진 것은 즉흥적이었다. 그는 3월 말과 4월 초 매일 밤 자신이 좋아하는 보수적인 폭스뉴스를 시청했다. TV 의사와 해설가들이 폭스뉴스에 나와 이 말리리아 치료제의 효과를 과장하는 얘기를 계속 들었다. 또 루디 줄리아니 전 뉴욕시장을 비롯한 친구들도 이 치료에 대한 얘기를 쏟아부었다. 줄리아니도 코로나19 지식이 거의 없는 변호사다.
그는 스티븐 한 식품의약국(FDA) 국장에게 이 치료제에 대한 사용 승인을 독촉했다. 한 국장은 이 치료제가 심장에 독성을 유발시킬 수 있다고 설명해야 했다.
트럼프의 만병통치약 꿈은 코미디처럼 끝이 났다. 미국 보훈처는 4월 21일 코로나19 환자들에게 하이드록시클로로퀸을 투입한 결과, 이 치료제를 투입하지 않은 환자들보다 사망률이 높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사흘 뒤인 24일엔 FDA가 심장 박동에 심각한 문제를 초래할 수 있다면서 의사들에게 병원 밖에선 하이드록시클로로퀸을 사용하지 말 것을 경고했다.
트럼프는 공개적으로는 이 치료제에 대한 기대를 접었지만 실상은 달랐다. 그는 하이드록시클로로퀸에 대한 부정적인 연구결과를 보고하는 정부 당국자들에게 화를 냈으며 “보다 긍정적인 관점을 가지라”고 지시했다.
“신처럼 행동한다”…공격받은 보건당국자들
트럼프 참모들은 갈라졌다. 정치·경제 참모들은 이른 경제 정상화를 촉구했다. 그러나 보건당국자들은 ‘사회적 거리두기’ 유지를 고수했다.
트럼프의 사위인 재러드 쿠슈너 백악관 선임보좌관 등 실세들은 대부분 빠른 경제 정상화를 원했다.
위축된 보건당국자들은 단일대오를 구축했다. 앤서니 파우치 알레르기·전염병 연구소장과 데비 벅스 백악관 코로나19 태스크포스(TF) 조정관은 경제 정상화 세력에 힘겹게 맞섰다. 이들은 과학과 데이터로 트럼프를 설득시키려 애썼다.
일부 보건당국자들은 백악관 코로나19 TF 회의에서 ‘주술’적인 내용들이 의제로 오른다고 괴로워했다. 비과학적인 얘기들이 논의된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조기 경제 정상화 세력의 한 고위 인사는 “보건당국자들이 어느 정도는 신처럼 행세한다”고 비판했다. 이 인사는 이어 “보건당국자들에겐 과학이 전부다. 하지만 반드시 갖춰야 할 정치적 고려가 그들에겐 부족하다”고 주장했다.
트럼프와 조기 경제 정상화 세력들은 보건당국자들이 올린 ‘사회적 거리두기’ 지침을 강화하는 내용의 보고서를 발표 자료에서 빼는 수법을 구사하기도 했다.
트럼프는 또 미국 정부가 힘들게 구한 의료보호장비들을 병원들이 암시장에 내다판다는 의심을 드러내는 말도 했다.
언론과 싸우면서도 언론에 집착하는 트럼프
그렇다고 보건당국자들이 항상 밀린 것은 아니었다. 그들에게도 조용한 승리의 순간이 있었다.
트럼프는 당초 부활절(4월 12일)을 경제 정상화 시점으로 삼았다. 하지만 보건당국자들은 트럼프를 설득해 ‘사회적 거리두기’를 4월 30일까지 한 달 더 연장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다른 이유도 있었다. 트럼프는 TV를 통해 뉴욕 퀸스 인근의 병원에서 시체를 담은 백들이 운반되는 것을 봤다. 퀸스 지역은 트럼프가 어렸을 때 자란 곳이서 충격이 더 컸다. ‘사회적 거리두기’ 연장을 결정하는 순간에도 TV 시청이 영향을 미친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마크 메도스 백악관 비서실장과 다른 고위 참모들에게 전화를 걸어 ‘거의 매일 매 시간마다’ 짜증을 냈다. 때로는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간에도 그랬다.
트럼프는 자주 기분이 틀어졌다. 언론 때문이었다. 그는 비판적인 언론 보도에 대해 불평했고, 언론의 충분한 신뢰를 얻지 못한 데 대해 투덜댔다. ‘가짜 뉴스’라며 언론과 싸움을 벌이는 트럼프지만 속으로는 언론의 애정을 기대하는 이중적인 모습이었다.
폭스뉴스의 앵커 로라 잉그러햄은 트럼프가 외출금지 중일 때 두 번이나 백악관을 찾았다. 보수적인 언론인으로 유명한 앵그러햄은 4월 3일에 있었던 첫 방문에 두 명의 의료 전문가들을 데리고 왔다. 이 중 한명이 트럼프에게 하이드록시클로로퀸가 코로나19에 효과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 회동을 하는 일부 공화당 중진 의원들은 “TV 앵커가 트럼프에 대한 특별한 접근권이 있는 것이 민망하다”면서 “정부 전문가들보다 언론으로부터 정보를 간청하는 것은 트럼프의 전형적인 패턴”이라고 말했다.
잉그러햄은 4월 14일 또다시 백악관을 방문해 트럼프에게 ‘사회적 거리두기’를 접고 미국을 재개방할 것을 조언했다.
미국은 한국·싱가포르 등과 같이 코로나19 방역에 성공한 나라들의 원인들을 코로나19 확진자에 대한 추적 조사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장애물이 한둘이 아니다. 가장 큰 걸림돌은 미국이라는 거대한 땅에서 확진자들을 추적 조사할 인력이 크게 부족하다는 것이다.
스마트폰 앱을 추적 조사에 사용할 지도 결정해야 했다. 그러나 “트럼프의 가장 큰 관심은 추적조사 등이 아니라 언론에 자신이 어떻게 비칠지 여부”라고 고위 당국자가 말했다.
“실업률 15% 넘으면 대선 위험하다” 참모들의 경고
트럼프 대통령은 서둘러 미국 경제를 정상화시키기 위해 애가 탔다. 미국 경제가 계속 무너질 경우 올해 11월 미국 대선에서 패배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의 발목을 잡는 것이 있었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유지하더라도 얻을 수 있는 최선의 결과가 사망자 10만명∼24만명에 달할 것이라는 예측 모델이었다. 최악의 모델에선 사망자가 220만명까지 나올 수 있다고 추산됐다.
조기 경제 정상화 세력은 잔꾀를 냈다. 코로나19 피해 예측 모델에 대항해 경제 피해 예측 모델을 만드는 것이었다. 케빈 하셋 전 백악관 경제자문위원장이 3월 말부터 비밀스런 작은 팀을 이끌었다.
하셋팀의 경제 모델에서 코로나19 피해 예상 수치는 기존 분석치들보다 줄어들고, 경제 피해 규모는 늘어났다. 코로나19 대응보다 경제 정상화에 힘써야 한다는 논리를 제공한 것이었다. 조기 경제 정상화 세력은 이 모델이 나오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4월 말 미국 코로나19 사망자 수가 베트남 전쟁 사망자 수를 넘어서면서 하셋팀의 모델은 장밋빛 전망이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한 전직 당국자는 “엄청난 실수였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하셋은 의도적인 조작은 없었다고 반박했다.
래리 커들로 백악관 국가경제위원장과 하셋은 트럼프에 실업률이 두 자리 수를 기록할 수 있으며 수천만명이 일자리를 잃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참모들은 ‘실업률 15%’를 경계선으로 삼고, 이를 넘을 경우 대선 승리가 물 건너갈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셋은 미국 국내총생산(GDP)가 40%까지 떨어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트럼프는 ‘커들로의 아이들’로 불리는 언론재벌 스티브 포브스, 경제학자 아서 래퍼, 스티븐 무어 등과 통화를 가졌다. 이들은 동년배에다가 트럼프가 좋아하는 언론에 자주 나오는 명사들이었다.
무어는 트럼프에게 “빨리 미국을 개방하라. 작은 대공황을 맞을 것이다. 당신은 절대 부활할 수 없는 경제와 일자리라는 시체 박스를 갖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트럼프는 4월 30일을 끝으로 미국 정부 차원의 ‘사회적 거리두기’를 끝냈다. 그는 5일 애리조나주에 있는 마스크 공장을 방문할 계획이다.
이는 다중포석이다. 애리조나주는 대선 접전지역이다. 그리고 코로나19에 대응하면서 경제를 살리는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의도도 담겨져 있다.
워싱턴=하윤해 특파원 justic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