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접수한 박진섭, 1부서도 ‘무패 신화’ 잇는다 [2020 K리그 ②-이 감독을 주목하라]

입력 2020-05-04 19:24 수정 2020-05-04 20:45
박진섭 광주 FC 감독이 4일 국민일보와의 인터뷰를 마치고 광주월드컵경기장 보조구장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광주 FC 제공

박진섭(43) 광주 FC 감독은 지난 시즌 초 인터뷰에서 “앞으로 질 때까지 절대 정장을 벗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리고 조끼까지 껴입는 겨울용 풀세트 정장을 기온이 30도를 넘나드는 7월 말까지 벗지 못했다. “시즌 끝까지 감독님이 정장을 못 벗게 하겠다”며 죽어라 뛰어 프로축구 K리그2 역대 최다 19경기 연속 무패(13승 6무)를 이뤄낸 선수들 덕이었다. 땡볕이 내리쬐는 그라운드에서 땀을 뻘뻘 흘리는 박 감독의 열정은 결국 K리그2 우승과 다이렉트 승격으로 결실을 맺었다.

대단한 건 이 감독이 프로를 맡은 지 2년차에 불과했단 사실이다. 2018년 2부리그로 강등된 광주를 맡아 프로에 데뷔한 박 감독은 팀을 K리그2 준플레이오프에 진출시키며 예열을 마쳤다. 그리고 두 번째 시즌, K리그2에서 광주는 사실상 ‘깡패’였다. 실점 2위 팀과 무려 11골이나 차이 날 정도의 수비력(31실점)은 타 구단에서 ‘뚫을 수가 없다’고 언급할 정도로 탄탄했다. 여기에 득점 1위(19골)에 오른 장신(193㎝) 공격수 펠리페를 앞세운 공격력(3위·59득점)까지. 광주가 갖춘 공-수 균형은 다른 팀들의 도전을 허용하지 않았다.

박진섭 감독이 4일 광주월드컵경기장 보조구장 내 회의실에서 국민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광주=이동환 기자

박 감독은 4일 광주월드컵경기장에서 국민일보와 만나 “1년차에 많이 져보기도 하고 준플레이오프 탈락도 해본 게 2년차에 전략을 세우고 경기를 준비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됐다”고 밝혔다. 이 말처럼, 수비력과 펠리페만이 지난 시즌 광주 돌풍의 원인은 아니었다. 시즌 중반 몇 번의 고비를 넘게 한 건 ‘2부 리그의 펩 과르디올라’라 할 만한 박 감독의 전술적 유연성이었다.

19연승이 깨지고 5경기 무승(4무 1패)의 부진에 빠졌을 시점, 박 감독은 3-3-3-1이라는 다소 생소한 포메이션을 들고 나와 무승의 고리를 끊었다. 전문 풀백이 없는 2-2-4-2 포메이션을 활용해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박 감독은 “펠리페가 경고누적으로 빠졌을 땐 공세적인 플레이를 하기 위해 3-3-3-1을, 중앙의 강한 밀집이 필요했을 땐 2-2-4-2를 활용했다”고 설명했다. ‘공수 균형’을 목표로 정해진 틀 없이 전술을 구성하는 박 감독의 ‘파격’은 그렇게 매 번 적중했다.

‘유명 선수는 유명 감독이 될 순 없다’는 말이 있다. ‘유명 선수 출신’이란 권위를 버린 박 감독은 그의 반례다. 성남 일화 시절 K리그 우승을 차지했고, 태극마크를 달고도 35경기에 나서 선수로서 거의 모든 걸 이룬 박 감독에게도 아픔은 있었다. 상무 소속이던 2002년 거스 히딩크 감독의 부름을 받지 못해 한일월드컵에 출전하지 못한 것. ‘좌(이)영표-우(박)진섭’으로 불리며 대표팀 붙박이였던 그에겐 큰 좌절이었다. 박 감독은 “실력이 뽑힐 정도가 안 됐지만, 상무에서 훈련량까지 부족했던 게 사실”이라며 “월드컵 땐 속으로 많이 아쉽고 답답했다”고 상기했다.

박진섭 광주 FC 감독이 지난해 5월26일 충남 이순신종합운동장에서 열린 아산 무궁화와의 프로축구 K리그2 원정 경기에서 겨울 정장을 입은채 땀 흘리며 선수들을 지도하고 있다. 한국프로축구연맹 제공

그런 아픔을 알기에 박 감독은 ‘동네 형’처럼 편하게 선수들을 대한다. 측면 플레이를 주로 하는 엄원상이 중앙에 투입됐을 때 박 감독에게 어려운 점들을 모두 이야기해 함께 해결책을 모색할 정도로 허울이 없다. 선수들과는 훈련 때마다 볼 돌리기를 함께하며 어울린다. 광주 관계자는 “볼 돌리기 실력은 아직도 박 감독이 최고”라고 귀띔했다. 박 감독은 “저희 때엔 감독님 대하기가 무서워 아이디어도 못내고 하고 싶은 이야기도 못했다”며 “선수들이 ‘감독님께 많은 걸 배울 수 있겠다, 재밌다’고 느껴 속마음까지 털어놓을 수 있도록 만들고 싶다”고 밝혔다.

감독 3년차. 광주 창단 10주년에 박 감독은 다시 시험대에 섰다. 광주는 객관적인 전력상 성남 FC, 인천 유나이티드와 함께 강등 후보로 꼽힌다. 박 감독의 목표는 ‘생존’이다. 지난 시즌 돌풍을 일으킨 나이 어린 선수단을 모두 지켰고, 김창수, 김효기 등 K리그1에서 잔뼈가 굵은 선수들을 영입해 경험을 불어 넣었다. 펠리페가 많은 견제를 받을 걸 대비해 엄원상, 두현석, 김정환 등 측면 자원들을 활용해 공격 루트도 다변화하는 데 많은 시간을 썼다.

박진섭 광주 FC 감독이 밝은 얼굴로 선수들과 함께 훈련을 진행하고 있다. 광주 FC 제공

개막전 상대는 동갑내기 친구 김남일 감독이 이끄는 성남이다. 올 시즌 K리그1 최연소 감독인 둘은 공교롭게도 K리그1 데뷔전에서 생존을 위한 외나무다리 맞대결을 하게 됐다. 박 감독은 “스포츠가 분석대로 흘러가면 재미 없다. 강등 1순위 분석이 틀렸다는 걸 살아남아 보여주겠다”며 “특히 비슷한 레벨의 성남 등엔 꼭 승리 방법을 찾아낼 것”이라고 각오를 다졌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으로 K리그 개막이 연기돼 박 감독은 올해엔 여름 정장을 입고 개막전을 맞는다. 올 시즌은 연승하더라도 똑같은 정장을 고수하지 않을 계획이다. 그는 “정장 때문에 나한테만 스포트라이트가 쏠려 선수들에게 미안했다”며 “(징크스는) 아무도 모르게 나 혼자만 지킬 것”이라며 웃었다.

광주=이동환 기자 hu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