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능하다고 믿으면 미친 거”…진중권 ‘개표조작 음모론’ 비판

입력 2020-05-04 08:42
진중권 동양대 교수가 2014년 1월 13일 오전 서울 마포구 연남동 휴머니스트 사옥에서 열린 '미학 오디세이' 20주년 간담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뉴시스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가 보수 진영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개표조작 음모론을 향해 “어떻게 가능한지 구체적으로 시나리오를 제시해 보라”고 비판했다.

진 전 교수는 지난 3일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개표조작 음모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 일이 도대체 어떻게 가능한지, 구체적으로 시나리오를 제시해 보라. 얼마나 개연적인지 구경 좀 하자”며 “문재인 정권이 선거에 패배할 것 같아서 부정선거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자, 그래서 어떻게 했다는 얘기냐”며 운을 뗐다. 진 전 교수가 거론한 ‘개표조작 음모론’은 민경욱 미래통합당 의원 등이 제기하고 있는 ‘사전투표 조작설’인 것으로 보인다.

진 전 교수는 부정선거가 가능한 가상의 시나리오를 설명했다. 그는 “일단 바꿔치기할 투표용지를 인쇄할 인쇄소를 비밀리에 섭외해야 할 것이다. 인쇄소 사장은 물론 직원들 입단속도 해놔야 한다. 그 투표용지에 도장을 찍을 알바생들도 고용해야 한다”며 “사전조사를 통해 비밀을 지켜줄 사람들을 미리 물색해놔야 한다. 몰래 도장 찍을 작업장소도 마련해야 한다”고 했다.

민경욱 미래통합당 의원이 29일 오후 인천시 연수구 연수구선거관리위원회에서 인천지방법원의 제21대 총선 연수을 투표함·투표지 증거 보전 작업을 참관하면서 투표지를 직접 나르고 있다. 인천지법은 연수을 선거구에서 낙선한 민 의원이 선거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다며 제기한 투표지 등 보전신청 일부를 인용해 해당 지역구 투표함과 투표지를 증거로 보전하기로 했다. 뉴시스

진 전 교수는 이어 “아울러 각 지역 투표율을 정확히 예측해야 한다. 바꿔치기한 투표용지의 수가 실제 투표자 수와 일치해야 하기 때문이다. 안 그러면 들통난다”라며 “그다음엔 전국 253개의 지역구에서 투표함을 바꿔치기해야 할 것이다. 그러려면 모든 지역의 선관위 직원을 매수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단 한 명이라도 매수에 실패하면 안 된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바꿔치기한 진짜 투표함과 투표지를 처리해야 한다. 그러려면 253개 투표함을 소각 처리할 장소와 인원이 필요할 것이다”라며 가상 시나리오를 끝맺었다.

진 전 교수는 자신이 쓴 가상 시나리오에 대해 “이게 가능하다고 믿는다면, 그냥 미친 거다”라고 비판했다. 그는 이어 “그러니 그런 분은 저보다는 의사 선생과 대화를 나누는 게 더 생산적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진 전 교수는 또 “음모론에 대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일종의 ‘귀류법’을 사용하는 것이다”라고도 했다. 그는 “음모론의 주장을 참이라고 가정할 경우 그 대가로 얼마나 부조리한 전제들을 새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보여주면 된다. 그 안에 들어가 그 말도 안 되는 논리를 일일이 반박할 필요 없다. 또 다른 논리를 만들어내서 덤빌 테니까”라며 “그건 일종의 편집증이라, 논리적으로 설득이 안 된다. 논리가 아니라 심리의 문제”라며 글을 맺었다.

인천범시민단체연합 회원과 미래통합당 민경욱 의원이 지난 22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소통관에서 "4.15총선에서 부정선거 사례로 의심되는 정황이 있어 증거보전 신청과 재검표 등을 추진하겠다"고 밝힌 뒤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진 전 교수는 이날 페이스북에서 개표조작 음모론의 악순환을 설명하기도 했다. 그는 “유튜버는 대중이 듣고 싶어하는 허구를 만들어 제공하고, 대중은 하루 종일 그런 콘텐츠만 듣다가 결국 그 허구를 현실로 착각하게 되고, 그 허구가 현실 혹은 사실과 충돌하면 그 인지 부조화 상태를 해결해 줄 또 다른 허구에 대한 니즈를 갖게 된다”며 “그 니즈는 보수 유튜버들에게 좋은 돈벌이 기회가 된다. 수요가 있는 곳엔 당연히 공급이 따르기 마련이다. 그 결과 집단 전체가 현실에서 유리되어 자기 세계 안에 갇혀 버린다”고 진단했다.

진 전 교수는 “민중은 창작을 한다”는 하이데거의 명언을 인용하며 “유튜버들이 만드는 컨텐츠는 일종의 집단청작, 즉 디지털시대의 새로운 민중창작이라고 할 수 있다”며 “알약 하나 먹는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그 허구는 남이 만든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가 만든 것이라 빠져나오기가 더 힘들다”고 했다.

하지만 민 의원을 포함한 일부 보수층들은 개표조작 음모론을 끊임없이 재생산하고 있다. 민 의원은 3일 페이스북에 “Don’t allow RIGGED ELECTIONS!(부정선거가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트위터를 공유하며 “왜 갑자기 이런 트윗을 남겼을까”라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민 의원은 또 “사전선거가 무효라면 이번 선거는 모두 무효”라고도 했다.

박준규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