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들 교회에 오물 뿌리고 천막교회에 화약 던져

입력 2020-05-03 14:02

광주신학교 신학생 시절 소명감과 부르심의 감격 하나만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새벽기도회를 해도 가장 오래 남아 기도했고 기도원에 가도 주변에서 기도하는 사람이 다 내려갈 때까지 끝까지 남아 기도했다. 그때 기도제목은 이랬다. “하나님, 저를 써 주옵소서. 순교자로 써 주시든지, 선교사로 써 주시든지, 저를 써 주옵소서.”

그렇게 소명감이 충만할 때 마침 신학교 광고판에 전남 화순 백암리에서 개척할 사람을 찾고 있다는 광고가 붙었다. 그곳은 백암리 1,2구와 광사리를 합해서 약 300여 가구 되는데 교회가 없었다. 그 마을은 옛날 능주 지역의 목사(牧使)가 태어난 곳이라고 해서 아직도 반상(班常) 차별이 심한 곳이었고, 텃세가 세서 다른 마을 사람이 이사 와서는 살기 힘든 곳이었다.

이미 한 전도사가 개척하려고 도전했다 포기하고 나온 곳이었다. 이야기를 듣자 가슴이 뛰고 그곳에 교회를 개척해야겠다는 감동이 왔다. 그래서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스물한 살의 어린 신학생이 무턱대고 덤벼들었다.

먼저 수 년 동안 비어 있던 빈집을 얻어서 천막을 치고 교회를 시작했다. 그런데 진짜 하나님의 은혜로 병자들이 고침을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삽시간에 몇십 명 교인으로 부흥했다.

그때 조금 더 전략적으로 전도를 해야 했는데 무조건 제사를 다 끊으라고 했다. 집을 짓는다고 예배를 드리러 갔는데 돼지머리를 차려놓고 고사를 지내면 마음대로 치워버렸다. 그뿐만 아니라 새벽부터 교회 차임벨을 엄청나게 크게 틀어놓고 이 마을 영혼들을 구원해 달라고 무릎 꿇고 기도했다.


그때부터 백암리 부락 유지들은 비상 대책을 세우고 교회를 나간 자는 벌금 1만원, 이를 신고한 자는 상금 6000원, 교인 집에 일해준 사람도 벌금 1만원을 매겼다. 만일 교회에 땅을 파는 사람은 아예 그 부락에서 추방한다는 부락 자치법까지 세웠다.

밤마다 부락 청년들은 교회에 와서 오물을 뿌리고 갔다. 천막 교회에 화약을 던져 구멍이 난 적도 있었다. 차임벨은 소리가 나지 않도록 줄까지 끊어버렸다. 이장과 마을지도자들은 “언제 나가려느냐”고 협박했다.
어떤 때는 150~200여명의 주민이 술을 먹고 몰려와서 멱살을 잡고 얼굴에 가래침까지 뱉었다. 그래도 껄껄껄 웃으면서 예수 믿으시라고 전도했다. “저는 여러분들을 위해서 죽을 준비가 돼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죽기 전에 꼭 여러분들 예수 믿고 천국 가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에게 맞아 죽어도 좋습니다.”

나중에 마을 유지들은 승려와 용하다는 점쟁이를 데려와 마을에 절간을 짓도록 해 주고 무당집을 차려줬다. 영적 대결에 들어간 것이다. 특히 내가 학교에 가고 없을 때면 무당은 마을 심방을 다니며 사주를 봐 주고, 교회를 다니면 몹쓸 일을 당한다고 흉흉한 소문을 내고 다녔다. 전도는 고사하고 교회를 짓는다는 것은 100% 불가능한 일이었다.

“소 전도사, 이 동네는 도저히 교회를 못 세울 것 같으니 당장 철수하게.” 오죽하면 노회 어른들이 철수 명령까지 내렸다. 그때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사정했다. “목사님, 철수 명령만큼은 내리지 말아 주세요. 저는 분명히 하나님께 응답을 받았습니다. 반드시 교회를 짓고 이 마을 사람들을 전도해서 예배당을 꽉꽉 채워 복음화하겠습니다.”
목사님들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당시 낮에는 신학교를 다니고 저녁에는 전도했다. 월요일과 토요일은 항상 무등산 기도원에 가서 눈물로 기도했다. 그렇게 4년이 지나고 말로 할 수 없는 여러 기적의 사건들이 나타났다. 주민들도 감동하고 결국 땅을 사서 예배당을 짓게 됐다.


애초 계획은 1년 만에 예배당을 짓고 공부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나의 교만을 꺾으시고 용광로 속에서 훈련을 시키셨다. 한 영혼, 영혼을 포용하고 사랑하며 핍박과 환란의 강을 건너는 것을 배웠다. 용기도 배웠을 뿐만 아니라 용기보다 더 중요한 겸손을 깨달았다. 그때 훈련받은 게 오늘의 목회에 영혼의 데이터베이스가 됐다.

정금성 권사님이 그때는 장모님도 아니었는데 오셔서 도움을 주셨다. 광주의 류중룡 장로님, 장민기 장로님이 예배당 건축에 큰 도움을 주셨다. 그곳에서 4년간 청춘의 시간을 바치며 목회의 모판 훈련을 받았다. 문학을 그렇게 좋아하면서도 시집 한 권, 소설 한 권도 손에 들지 못하고 오로지 영혼 구원과 교회를 세우는데 청춘을 바쳤다. 그리고 그 펄펄 끓는 젊음의 나이에 어느 자매와도 손 한 번 잡아 보지 못했다.

지금도 미련이나 후회가 없을 정도로 모든 것을 바쳤다. 몇 년 전 그 마을을 방문했을 때 이장이 백암교회를 설립한 소 목사가 왔다고 방송까지 해 주고 환영해줬다. 한 번밖에 없는 청춘을 그곳에 쏟았지만 그 기간이 풀무불 같은 연단의 시간이었다. 그 풀무불이 오늘의 목회를 있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