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극상·성추행·기밀유출…열거하기도 벅찬 軍기강해이

입력 2020-05-01 18:50
정경두 국방부 장관이 29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국방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의원들 질의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올해 들어 기강 해이에서 비롯된 군 관련 사고가 끊이지 않고 있다. 하극상 폭행, 장교 성추행, 마스크 횡령, 군사기밀 유출, 경계작전 실패 등이 숨가쁘게 이어졌다. 일일이 나열하기가 벅찰 정도로 많다.

장교도, 부사관도 음주운전
육군은 1일 경기도의 한 부대에 근무하는 A하사가 지난달 18일 경북 영주에서 음주운전을 하다 적발됐다고 밝혔다. 사고를 낸 상대방 운전자가 수습 과정에서 “(A하사가) 술을 마신 것 같다”며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은 도로교통법 위반(음주운전) 혐의로 A하사를 입건해 군에 넘겼다.

경기도 포천 인근 부대의 B대위도 최근 음주운전을 하다 적발됐다. B대위는 지난달 19일 부대 밖 동료 숙소에서 술을 마신 뒤 대리운전을 불러 부대 앞까지 이동했다. 이어 직접 차량을 몰고 부대 안으로 향하던 중 교통 신호에 걸렸고 잠이 들었다. 이를 목격한 시민이 경찰에 신고하면서 음주운전 사실이 드러났다.

군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이 확산되자 지난 2월부터 지난달 중순까지 간부들의 부대 회식과 사적 모임, 동호회 활동, 일과시간 이후 부대 밖 외출 등을 금지했다. 이런 명령에도 부대 밖에서 음주운전을 하다가 적발된 사례가 연달아 발생한 것이다. 육군 관계자는 “법과 규정에 따라 조치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하극상 폭행·성추행
군의 고질적인 문제로 지적된 폭행 및 성추행 사고도 끊이지 않고 있다. 병사가 상관을 때리고 부사관이 장교를 성추행하는 등 하극상도 벌어졌다.

지난달 27일 공군에 따르면 공군사관학교 C교수는 최근 2∼3년간 자신이 지도한 학생 장교들을 수차례 폭행한 혐의로 입건됐다. C교수는 군무원 신분으로 비행 실습 중 학생들의 조작이 미숙할 경우 폭언은 물론 폭행도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

국방부 직할부대 소속 육군 부사관이 병사와의 ‘내기 탁구’에서 졌다는 이유로 해당 병사를 폭행하기도 했다.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D상사는 지난 9일 병사 3명과 부대 내 탁구장에서 내기 탁구를 했다. 실제 돈을 주고받은 것은 아니며 구두로 내기 액수를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기에서 진 D상사가 함께 치던 다른 병사들을 내보낸 후 병사 1명의 멱살을 잡고 밀쳤다고 한다.

경기도 육군 부대 E상병은 야전삽을 상관 F대위에게 휘둘러 구속됐다. 부대 내 사격장 정비작업을 마무리하지 않은 것을 F대위가 지적하자 이 같은 짓을 저질렀다. F대위는 전치 2주의 상처를 입었다.

남성 부사관이 남성 장교를 성추행했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군 소식통 등에 따르면 부사관 G씨 등 4명은 3월 29일 새벽 위관급 장교인 H씨 신체를 만진 혐의를 받고 있다. 이들은 술을 마시고 숙소로 찾아가 범행한 것으로 조사됐다.

제주 해군기지(제주민군복합항) 모습. 연합뉴스

아무나 드나드는 군사기지
민간인의 군 기지 무단 침입 사건도 올 들어 벌써 3건이나 발생했다. 합동참모본부에 따르면 송모씨 등 민간인 4명은 지난 3월 7일 오후 2시쯤 제주 해군기지의 미관형 철조망을 펜치를 이용해 가로 52㎝, 세로 88㎝ 크기로 잘랐다. 송씨 등 2명은 기지로 침입해 오후 3시50분까지 구럼비 바위가 있는 수변공원을 돌아다니는 등 아무런 제지 없이 기지 내부를 활보했다. 조사 결과 사람 움직임을 포착하면 경고음이 울리는 능동형 CCTV 등 경계체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5분 대기조’ 역시 늑장 출동하며 허점을 드러냈다.

제주 해군기지가 민간인에게 뚫린 지 9일 만에 비슷한 사건이 벌어졌다. 합동참모본부는 3월 16일 50대 남성 김모씨를 경기도 시흥시에 있는 육군 수도방위사령부 예하 방공진지 울타리 안에서 발견해 신병을 확보했다. 김씨는 진지 울타리 밑의 땅을 파 침입한 것으로 조사됐다. 이밖에 지난 1월 3일 진해 해군기지 사령부 정문으로 70대 남성 노모씨가 무단 침입한 사실도 뒤늦게 드러났다.

‘비밀’ 아닌 군사기밀
군사기밀 유출 문제도 심각하다. 야간 시간대에 적과 아군을 구별하기 위해 사용하는 암구호(3급 비밀)가 카카오톡을 통해 버젓이 공유되거나 무기개발 관련 기밀 연구자료가 유출되기도 했다.

강원도 화천 한 부대의 이모(21) 일병은 지난 2월 2일 외박 복귀 전 동기생활관 단체 카카오톡 채팅방에 당일 암구호 답어를 물어봤다. 야간에 적과 아군을 식별하기 위해 사용되는 암구호는 보안성이 중요하다. 매일 바뀌며 유출 시 즉시 폐기된다. 같은 날 오후 8시50분쯤 위병소를 통과할 때 이 일병이 암구호 답어를 말하자, 위병소 근무자가 이를 수상히 여겨 즉각 상부에 보고했다. 조사 결과 해당 채팅방에서 동기 1명이 답어를 알려준 것으로 나타났다.

군과 경찰은 국방과학연구소(ADD) 퇴직자 20여명이 기밀 연구자료를 외부로 유출한 정황이 포착하고 수사를 벌이고 있다. ADD 등에 따르면 지난해 퇴직한 J연구원은 기밀 연구자료 수만건을 USB에 담아 외부로 유출한 혐의를 받고 있다. J연구원은 국내 무인전투체계 개발 사업 초창기부터 핵심 인력으로 참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코로나 와중에 마스크 횡령
이밖에 경기도의 한 육군 부대에서 행정보급관으로 근무하는 I상사가 지난 2월 부대 창고에서 장병용 마스크(KF94) 2100장을 외부로 반출·판매한 혐의로 수사를 받고 있다. 이처럼 잇단 사고로 군에 대한 전면적인 쇄신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제기되자 정경두 국방부 장관은 직접 기강 잡기에 나섰다. 정 장관은 지난달 20일 전군에 보낸 지휘서신에서 “각급 부대에서는 지휘권과 장병 인권이 조화롭게 보장되도록 감찰·인사 기능을 활용해 (기강 해이를) 예방하라”며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는다’는 격언처럼 예방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럼에도 각종 사건·사고가 연달아 발생해 정 장관은 결국 고개를 숙였다. 정 장관은 지난달 29일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여러 군 기강 사건 때문에 심려를 끼쳐 매우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며 “엄중하게 인식하고 있고 모든 사안들은 법규에 따라 철저하게 엄정 처리될 것”이라고 말했다.

손재호 기자 sayh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