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 딸 방세 벌려고… 불길 속엔 가장들이 있었다

입력 2020-04-30 17:30 수정 2020-05-01 11:27

“부디 그곳에서는 돈에 쪼들리지 않길 바란다.”

경기도 이천 물류창고 공사현장 화재사고로 동생 A씨(50)를 잃은 B씨(53)는 30일 희생자 유가족들이 임시거처로 쓰고 있는 모가실내체육관에서 원통한 심정을 누르며 이렇게 말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1만원 지폐 한 장 들고 상경한 뒤로 온갖 공사 현장서 고생스레 일해 온 동생을 이리 허망하게 떠나보낼 줄은 몰랐다고 했다. 코 주변이 새까맣게 그을린 시신을 확인하면서 B씨는 동생이 화재 연기에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생각하며 가슴아파했다.

전라도에서 나고 자란 A씨는 고향에서 결혼해 세 자녀를 낳았다. 그 중 둘째 딸이 지난해 수도권의 한 대학에 입학했다. A씨는 타지서 홀로 생활하게 된 딸 걱정에 이천에 함께 올라왔다. 딸 방세와 생활비라도 벌어볼 생각으로 신축 물류창고 공사현장에서 일을 시작했다고 한다. B씨는 “조카딸이 행여나 자기 때문에 아버지가 죽었다고 생각할까봐 걱정이 된다”며 “평소 형제들한테도 아쉬운 소리 한번 못하던 동생이었는데, 이제 편한 세상에서 불행하지 않게 살았으면 좋겠다”며 눈물을 훔쳤다.

희생자 대부분은 A씨처럼 가정의 생계를 짊어진 가장들이었다. 한 노인 유족은 “(사고를 당한) 아들이 66세”라며 “손주를 벌써 둘이나 봤는데, 그 나이에 먹고 살겠다고 안산에서 새벽 4시에 일어나 출퇴근하다가 이런 일을 당했다”며 애통해했다. 부자가 함께 일하다 사고를 당한 안타까운 사연도 있었다. 이모씨 부자는 함께 공사현장에서 작업을 하던 중 화재 발생을 인지하고 함께 2층 창문을 통해 뛰어내렸다. 아들은 다행히 목숨을 건졌지만, 아버지는 숨졌다.

일부 유족은 아직 희생자 신원확인이 이뤄지지 않아 애끓는 마음으로 조사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워낙 화재가 강했던 탓에 현재 희생자 38명 중 9명의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상황이다. 한 여성 유족은 “물류창고 앞에 (평소 타던) 차가 주차돼 있는데, 어떻게 된 건지 아직 확인이 안 된다”며 “혹시 소지품 같은 게 있는지 직접 들어가서 확인해 볼 수는 없냐”며 경찰 관계자에게 호소했다.

경찰은 이날 오전 8시30분쯤 신원확인을 위한 유전자 채취 작업을 진행했다. 검사를 신청한 가족들은 모가실내체육관 내 단상 앞에서 차례대로 유전자 채취에 응했다. 채취를 기다리며 다른 가족의 전화를 받은 한 장년 남성 유족은 “신원이 밝혀지지 않아서 유전자 검사를 해야 한다네”라며 연신 흐느꼈다. 경찰은 채취한 검체를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보내 분석할 예정인데, 결과가 나오려면 이틀 정도 소요될 것으로 보인다.

이천시 재난안전대책본부는 창전동 서희청소년문화센터 강당에 희생자를 기리기 위한 합동분향소를 설치했다. 강당 한쪽 끝에 마련된 3단 규모의 분향제단에는 희생자 수인 38개 영정사진과 위패가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됐고, 바닥에는 하얀 포를 깔았다. 지금까지 신원이 확인된 희생자 29명의 영정사진과 위패가 먼저 놓였다.

제단 앞에 빽빽하게 늘어 선 유족들은 영정사진 속 희생자의 이름을 부르며 오열했다. 다만 공식적인 조문은 희생자 9명의 신원확인 작업이 완료될 때까지 미루기로 했다. 합동분향소를 찾은 진영 행정안전부 장관은 희생자들을 조문한 뒤 유족들과 가진 면담에서 “사망자 장례와 피해자 가족 지원 및 부상자 치료에 최선을 다하고 사고원인 조사에도 만전을 기하겠다”고 말했다.

희생자들과 같은 협력업체에서 일하던 동료들은 분통을 터뜨렸다. 경남 창원의 다른 현장에서 일하고 있다는 한 동료 근로자는 “상식적으로 인화성 물질이 있는 곳에서는 불똥이 조금이라도 튀는 작업을 같이 하면 안 되는 것 아니냐”며 “적어도 내가 있는 현장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화재가 나기 직전 가연성 물질인 우레탄폼 작업이 이뤄지는 공간에서 용접 작업이 동시에 이뤄진 점을 지적한 것이다.

물류창고 시공업체 ‘건우’의 이상섭 대표는 유족들에게 눈물을 흘리며 사과했다. 오후 2시쯤 체육관 단상 위로 올라간 이 대표는 곧장 무릎을 꿇고 “정말 죄송하다”는 말만 연신 반복했다. 유족들은 관계자들의 부축을 받아 체육관을 나서던 그를 둘러싸고 “사람이 죽었는데, 대책을 얘기해야 할 것 아니냐”고 요구했다. 항의를 받던 이 대표는 체육관 앞 잔디밭에서 그대로 쓰러져 실신했고, 119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옮겨졌다.

이천=송경모 기자 sso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