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데미안’이 두 달여간의 초연을 지난 26일 마쳤다. 이튿날 오 작가를 서울 대학로 근처에서 만났다. 그의 공연은 젊은 군인 싱클레어가 전쟁터 폐허에서 죽어가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전우들은 각자의 ‘얼굴’로 죽음을 맞았고 싱클레어는 두려웠다. 그때 어둠 속에서 데미안이 걸어와 손을 내밀었다. 과거로 향하는 문턱을 넘는 순간이었다. 선과 악을 통해 격동하는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여정은 괴로웠다. 전쟁터로 돌아온 싱클레어의 ‘얼굴’은 이전과는 달랐다.
‘얼굴’은 내면의 자아로 해석할 수 있다. 오 작가는 여기서 정신과 의사이자 심리학 박사인 칼 구스타브 융을 말했다. 헤세가 소설 ‘데미안’을 떠올리기까지 지대한 영감을 줬던 인물이다. 1차 세계대전 당시 헤세는 심한 우울증을 갖고 있었다. 가정은 비통했고 사정은 궁핍했다. 헤세는 이 무렵 융을 만났다. 소설이 나오기 2년 전이다. 헤세는 융을 만난 지 5일 만에 꿈에서 데미안을 만났다고 한다.
오 작가의 작품에도 융의 분석심리학이 녹아있다. ‘얼굴’의 의미도 이를 통해 확장할 수 있다. 누군가를 싫어하는 이유는 상대에게서 자신의 단점을 보기 때문이라고 융이 주장했고 오 작가는 동의했다. 스스로의 내면을 올곧게 다지는 것이 누군가와 대척하지 않을 해법일 수 있다. 오 작가는 “게으른 누군가를 싫어한다면 자신의 게으름을 고치는 편이 낫다. 내가 게으르기 때문에 상대의 게으름을 본 것”이라며 “우리는 그저 공격하기 바쁘다. 손가락은 늘 내가 아닌 남을 향한다. 공연을 보는 동안만큼은 자신을 돌아봤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얼굴’의 의미를 공연에서는 손과 그림자로 표현했다. 유독 손을 사용하는 안무가 많았는데, 오 작가는 “말이라는 언어로만 표현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며 “말과 말 사이 공백을 채우려 손동작을 떠올렸다. 단순 움직임을 넘어 하나의 언어처럼 보이길 바랐다”고 설명했다. 싱클레어의 손동작이 무대에 거대한 그림자로 비치는 장면은 그의 아이디어다. 손이 ‘진실’이라면 그림자는 ‘거짓’이다. 진실은 커다란 거짓에 가려져 있을 때가 많다. 하지만 사람들은 늘 손을 보지 않고 그림자를 본다. 나를 보지 않고 남을 본다.
융은 헤세에게 한 개의 자아 안에 남성성과 여성성이 동시에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줬고, 이런 고민은 작품 안에 녹아있다. 실은 싱클레어와 데미안도 아니마(남성 속 여성성)이거나 아니무스(여성 속 남성성) 아닐까? 이 질문에서 캐릭터 프리 캐스팅이 시작됐다. 성별 구분을 없앤 젠더 프리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간 개념이다. 뮤지컬 ‘데미안’은 고정배역이 없는 2인극으로 정인지, 유승현, 전성민, 김바다, 김현진, 김주연 모두 싱클레어와 데미안을 연기했다.
오 작가는 “싱클레어가 곧 데미안이고, 여성이면서 남성이 아닐까”라며 “잃어버린 반쪽을 찾아야 비로소 완전한 작품이 될 것 같았다”고 말했다. 그래서 반드시 캐릭터 프리여야한다고 생각했다. 대본 첫 장에 ‘남녀의 구분이 없으며 배우가 양쪽을 다 연기했으면 좋겠다’고 적은 것도 모자라 ‘상당히 어려울 것이지만 정말 부탁드린다’고 덧붙이기까지 했다.
원작은 1차 세계대전 직후인 1919년에 나왔고, 전쟁의 상처가 스며있었다. 뮤지컬 ‘데미안’의 무대도 전쟁터 폐허로 꾸며졌다. 도처에는 쓰레기가 널려있었다. 오 작가는 “무대 위 모든 것은 쓰레기처럼 보이지만 처음부터 쓰레기였던 것은 아무것도 없다”며 “원래는 모두 찬란했다”고 말했다. 무대는 비스듬했는데 기울어진 사회와 관념의 균형을 바라는 상징적 장치였다.
오 작가는 끝으로 죽음을 말했다. 공연은 싱클레어의 죽음 문턱에서 시작한다. 죽음은 곧 마지막으로 받아들여 지곤 한다. 그러니까, 공연의 ‘시작’을 인생의 ‘끝’에서 연 셈이다. ‘죽음은 또 다른 의미의 시작이 아닐까’. 그의 세계관에 따르면 인생은 죽음을 통해 비로소 완성되고, 고인을 향한 남은 자의 기억 역시 죽음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는 공연을 본 관객들이 저마다의 삶을 떠올리며 내일을 계획하기를 바랐다. 그리고 생각했다. 마흔을 거쳤거나, 마흔을 앞둔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에게 뮤지컬 ‘데미안’이 선물 같았기를.
박민지 기자 pm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