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이 숙원사업인 상고제도 개선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숙의민주주의에 따른 공론화 절차를 거치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과거 신고리 원자력발전소 5·6호기 건설 중단 문제나 대입제도 개편 과정에서 활용됐던 시민참여형 의사결정 방식이다. 법률 전문가들의 입장만이 아니라 사법 서비스의 실수요자인 일반 시민들의 의견을 적극 반영하려는 의도가 담긴 것으로 풀이된다.
28일 국민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대법원 산하 상고제도개선특별위원회(위원장 이헌환)는 상고제도 개선을 위한 여론 수렴 방식으로 시민이 직접 참여하는 ‘숙의형 공론화 모델’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일반 시민 가운데 상고제도 개선 논의에 참여할 대표단을 선정한 뒤 깊이 있는 학습과 토론을 통해 나온 결론을 정책 결정에 반영한다는 취지다.
특위는 2017년 7~10월 정부가 신고리 원전 5·6호기 건설의 중단 여부를 정하기 위해 공론화위원회를 만들고 시민대표참여단의 심층 토론을 거쳐 결론을 내렸던 것을 참고 사례로 보고 있다. 이듬해 4~8월 대입제도 개편을 위해 같은 방식의 여론 수렴이 이뤄진 것도 감안했다.
시민이 직접 논의 과정에 참여할 경우 여론의 관심을 환기해 상고제도 개선의 동력을 얻을 수 있고 정책 결정의 명분이 생긴다는 장점이 있다. 신고리 원전 건설 중단 문제에 참여했던 시민들은 숙의를 통해 건설 재개라는 결론을 내면서도 원전 안전기준 강화와 신재생에너지 투자확대라는 보완 방안을 제안했다. 원전 건설 중단과 재개 의견 모두를 아우르는 결정이라는 호평을 받았다.
반대로 숙의를 거쳤는데도 뚜렷한 결론이 나지 않을 경우 상고제도 개선 논의가 표류할 가능성도 있다. 실제로 대입제도 개편 공론화 과정에서는 정시 비율을 늘리고 수능 상대평가를 유지하는 안과 정시·수시 비율을 대학 자율로 맡기고 수능 절대평가를 도입하는 상반된 방안에 대한 답변이 엇비슷한 비율로 나왔다. 숙의민주주의식 공론화의 한계를 보여줬다는 지적이 있었다.
특위는 지난 23일 보도자료를 내고 “상고심이 제 기능을 수행할 수 있도록 현행 상고제도가 개선돼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며 상고제도 개선 논의에 시동을 건 상태다. 특위는 “국민참여형 정책토론 등을 활용해 국민 공감을 받을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상고제도 개선방안을 도출하겠다”고 밝혔다.
대법원 내부에서는 매년 상고사건이 급증하는 탓에 제도 개선이 절실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그러나 그동안 여론의 무관심이란 큰 장벽을 넘어설 방법을 쉬이 찾진 못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역점 사업이었던 상고법원 도입에 실패했고, 이 과정에서 정권과 유착 의혹이 ‘사법농단’ 수사로 이어진 점도 극복해야 할 한계다. 대법원 관계자는 “숙의민주주의 방식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지만 구체적인 방식은 아직 정해진 게 없다”며 “향후 회의에서 논의가 이뤄질 것”이라고 밝혔다.
구자창 기자 critic@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