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아라비아가 사법체계 현대화에 속도를 내고 있다. 사우디는 최근 수년 간 여성의 사회 참여를 늘리는 등 변화를 시도하고 있지만 이슬람 형법 ‘샤리아’를 바탕으로 태형, 사형 등을 집행해 국제사회로부터 ‘인권후진국’이라는 비판을 끊임없이 받아왔다.
영국 BBC방송 등은 사우디가 지난 24일 태형을 금지한 데 이어 미성년자 피고인에 한해 사형제를 폐지하는 내용의 왕명을 발표했다고 26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사우디 정부 기관인 인권위원회의 아와드 알아와드 위원장은 “미성년자는 사형 대신 10년 이하의 소년원 구금형을 받게 될 것”이라면서 “이번 왕명으로 인해 사우디 형법은 현대화의 길로 더욱 접어들게 됐다”고 밝혔다.
사우디는 형법상 살인, 강도, 신성 모독, 왕가 모독, 테러, 내란, 성폭행, 간통, 마약 밀매 등 중범죄를 저지른 피고인에게 사형을 선고할 수 있다. 국제 앰네스티에 따르면 지난해 사우디에선 184명이 사형 당한 것으로 나타났다. 1995년 195명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수치다. 올해도 벌써 12명에게 사형이 집행됐다.
사우디 인권위는 이날 사형 집행을 금지한 미성년자의 나이 기준은 구체적으로 공개하지 않았다. 다만 유엔 아동권리협약은 만 18세 미만의 사형 선고 및 집행을 금지하고 있다.
가디언은 “이날 청소년 사형제 폐지가 발표되면서 최소 6명이 목숨을 구할 수 있게 됐다”고 전했다. 이슬람 소수 종파인 시아파 출신으로 ‘아랍의 봄’ 민주화 운동 당시 미성년자였던 이들은 사형을 선고 받고 형 집행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유엔과 국제 인권단체들은 이들에 대한 사형 집행을 중단할 것을 촉구해왔다.
사우디의 사법 개혁은 지금 사실상 왕국을 통치하고 있는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가 강력히 추진한 것으로 보인다. 보수적인 이슬람 사회인 사우디를 현대화하려는 의지를 피력해 온 왕세자는 2018년 여성의 운전과 축구경기 관람, 입대를 허용하고 수도 리야드에 35년 만에 상업 영화관을 열었다. 하지만 같은 해 사우디 출신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가 터키 이스탄불의 사우디 영사관에서 잔혹하게 살해되고, 반체제 인사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면서 왕세자의 ‘개혁 드라이브’는 무색해졌다.
카슈끄지 살해 사건은 특히 사우디의 사법체계에 대한 국제사회의 거센 비난을 불러왔다. 미국 워싱턴포스트(WP)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면서 사우디 왕실을 비판해 온 카슈끄지 살해의 배후로 왕실이 지목됐기 때문이다. 사우디는 서둘러 비공개 재판을 열어 살해 혐의를 받은 피고인들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그 과정에서 정작 살해 배후로 의심받는 왕세자의 최측근은 무죄 석방된 것으로 알려졌다. 사우디는 2014년 사회운동가 라이프 바다위에게 온라인 상에서 이슬람과 왕가를 모욕했다는 혐의로 태형 1000대를 확정하고 형의 일부를 집행해 인권단체들의 비난을 받기도 했다.
국제 인권 감시단체 휴먼라이츠워치의 중동·북아프리카 지역 담당자 애덤 쿠글은 사우디가 미성년자 사형을 금지하기로 한 것에 대해 “환영할만한 변화지만 수년 전에 이뤄졌어야 했다”면서 “사우디가 부당한 사법 체계를 개혁하는 데 더는 거리낄 게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국제사회는 사우디에 여전히 많은 ‘부당한 형벌’들이 존재한다고 지적한다. 태형과 미성년자 사형은 금지됐지만 참수형, 사지절단형 등은 남아있다. BBC는 “많은 인권운동가와 여성 활동가들이 아직도 구금돼 있다. 지난주엔 인권 운동가 압둘라 알 하미드가 뇌졸중으로 감옥에서 사망했다”고 전했다. 동료들은 그가 응급처치를 받지 못해 사망에 이르렀다고 주장하고 있다.
임세정 기자 fish813@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