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해가 뜨지 않은 시각. 양말 안에 바지 밑단을 쑥 밀어놓고 점퍼를 걸친다. 장화를 신고, 모자를 쓰고, 앞치마를 두른다. 장갑 낀 손에 마대까지 들면 준비 끝. 목적지로 걷다 보면 동이 튼다. 4월 초, 제주 중산간 초지에는 하얗게 서리가 내렸다. 어디 있을까. 아기 손처럼 둥그렇게 수줍은 모습을 하고 있을. 지난봄 이후 한 번도 만나지 못한. 그것이 이내 모습을 드러내고야 만다. “찾았다, 고사리! 오랜만이야”
부지깽이를 꽂아도 싹이 난다는 청명(淸明). 제주 들판에는 겨우내 머리를 웅크리고 있던 고사리가 땅 위로 모습을 드러낸다. 이 무렵 만나는 초물 고사리는 연하고 부드럽다. 맛도 가장 좋다.
4월 제주는 고사리로 섬이 들썩인다. 남녀 할 것 없이 허름한 배낭을 지고 들녘 곳곳을 파고든다. 육지에서 이사 온 이들도 고사리 맛을 알고 삼삼오오 짝을 지어 길에 나선다. 어르신들의 ‘들녘 출타’로 경로당이 텅텅 비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마을 어귀마다 산 입구마다 오름마다 길게 이어지는 어색한 주차 행렬은 십중팔구 ‘고사리 객’이다.
벳고사리 자왈고사리
제주 고사리는 억새가 우거지고 숲 깊은 곳에서 자라는 흑고사리를 최고로 친다. 이런 흑고사리를 얻으려면 혹시 모를 뱀과의 조우를 대비해 장화가 필수다.
이 무렵 제주의 전통시장에는 고사리 앞치마를 판다. 큰 주머니에 꺾은 고사리를 바로바로 넣기에 제격이다. 주머니엔 지퍼가 달려 앞으로 몸을 숙여도 쏟아지지 않는다. 앞치마가 가득 차면 배낭으로 옮기고 다시 빈 앞치마에 고사리를 채운다. 두 손이 자유로우니 ‘작업’이 한층 수월하다.
고사리 많은 곳은 며느리에게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그건 며느리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고사리가 많이 나는 곳을 잘 기억해두었다가 매년 그곳을 찾는다.
같은 시기의 고사리라도 크기는 천차만별. 집 마당에 말려지는 고사리를 보면 주인의 아침 작업 상황을 대강 알 수 있다. 잡풀이 적은 곳을 갔는지, 가시덤불을 헤치고 다녔는지를 말이다. 깊은 억새밭 고사리는 새끼손가락만큼 굵고 윤택하며 길이가 두 뺨은 너끈하다. 수고를 감수한 만큼 적게 끊어도 무게가 금방 채워지니 자왈(‘덤불’을 뜻하는 제주어)로 들어가는 사람은 늘 깊은 자왈만 찾는다. 반면 ‘벳고사리’는 큼직한 ‘자왈 고사리’와 달리 가늘고 짧다. 품종이 아닌 서식지에 따른 차이다. 벳고사리는 벳(‘햇빛’을 뜻하는 제주어)이 잘 드는 들판에서 자란 고사리를 말한다.
제주 사람들은 이렇게 봄에 고사리를 꺾으면 햇볕에 잘 말려두었다가 가장 먼저 젯상에 올리고, 겨울까지 육개장이나 고등어 조림, 돼지고기볶음 요리에 넣어 긴요하게 쓴다. 특히 제주의 고사리육개장은 소고기를 쓰는 육지부와 달리 가늘게 찢은 돼지고기와 고사리를 듬뿍 넣고 메밀가루를 섞어 뭉근하게 끓여낸다. 걸쭉한 죽처럼 생겼다. 잡냄새를 없애기 위해 실파를 충분히 올리고 삶은 돼지 간, 자리젓을 곁들여 먹는다. 예전에는 메밀가루 대신 보릿가루를 넣기도 했다.
이렇게 그해 쓸 고사리를 충분히 채우고 나면 나머지는 육지에 사는 가족들에게 보내고, 또 그 나머지는 소소한 용돈 벌이다. 제주산 고사리는 건 고사리를 기준으로 100g에 1만원 내외에 거래된다. 올해는 지난겨울 눈이 적어 가격이 조금 더 올랐다. 청정한 제주 들녘에서 자란 고사리는 맛도 먹는 기분도 일품. 제주 밖에서 더 찾는 이들이 많아 바지런한 중산간 집들은 봄철 기백만 원쯤은 너끈히 벌고 간다.
이른 새벽 발품 손품을 팔아 꺾은 고사리는 바로 삶아 널어야 한다. 고사리 털을 가득 안은 거품이 몇 번 오르락내리락할 때쯤 가장 굵은 고사리 대를 손으로 눌러 푹 들어가면 잘 삶아졌다는 의미다. 발이나 사용하지 않는 방충망 등에 고루 간격을 주어 널면 봄볕과 제주 바람이 고사리를 상품으로 만든다. 이제 남은 건 잘 마를 때까지 기다리는 일이다.
귀한 것들이 흔해지는 제주의 봄
고사리는 여러해살이 양치식물로 전국 곳곳에서 자라지만 제주는 유독 고사리와 인연이 깊다.
제주 고사리는 예부터 ‘궐채’라 불리며 임금님께 진상됐다. 제주 사람들은 아무리 삶이 척박해도 제주를 떠날 수 없었지만(출륙금지령), 제주 고사리만큼은 배를 타고 한양으로 향할 수 있었다. 그만큼 최상품으로 쳤다. 지금도 건 고사리는 ㎏당 최소 10만원 안팎으로 거래되니 한우 채끝살보다도 비싼 셈이다.
조선 시대 제주로 유배 온 거창 선비 정온(1569~1641)은 제주에 머무는 동안 야생 고사리를 즐겨 먹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는 10여 년간의 제주 유배에서 풀려난 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한탄하며 덕유산 자락으로 내려가 살았는데, 중국 주나라의 백이와 숙제 형제처럼 고사리와 미나리만을 먹고 살았다고 해서 그의 은거지는 ‘채미헌’(고사리를 꺾는 집)으로 불리게 된다. 훗날 정온은 ‘제주 오현’ 중 한 사람으로 추앙된다. 제주에 머무는 동안 학문을 게을리하지 않았고 제주 사람들에게 글공부를 가르쳐 지방 문화 창달에 한 축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고사리는 그냥 나물이 아니라 의리와 절개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제주에서는 4월 전후로 꼭 3~4일에 걸쳐 비가 온다. 사람들은 이 비를 ‘고사리 장마’라 부른다. 이 비가 끝나면 고사리 철이 바로 접어들기 때문이다. 먹을 것이 귀했던 시절에는 제주에 ‘고사리 방학’이 있었다. 고사리 방학이 되면 중산간(해발 200~600m)에 사는 아이들은 고사리 같은 손으로 고사리를 꺾어 부모의 일손을 도왔다.
제주에는 ‘고사리는 아홉 성제(형제)’라는 속담이 있다. 고사리의 줄기가 한 번 꺾이면 계속해서 아홉 번까지 다시 난다는 뜻이다. 또, 포자로 번식하는 고사리는 주변에 무리를 지어서 번식하기 때문에 고사리 하나가 있으면 반드시 주변에 다른 고사리들이 같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고사리가 쑥쑥 자라는 계절이면 어김없이 제주도소방안전본부가 ‘길 잃음 안전사고 주의보’를 발령한다. 무슨 이런 주의보가 있나 싶지만, 제주에선 길을 잃어 저체온증으로 목숨을 잃는 경우도 간혹 발생한다. 한적한 산에서 새 소리를 들으며 여기저기 숨겨진 고사리 찾아 들어가다 보면 방향을 잃기 쉽다. 길 잃음 사고 대부분이 이 무렵, 고사리 채취 과정에서 발생한다.
실제 최근 5년간(2015~2019) 제주에서 발생한 길 잃음 사고는 모두 511건. 이중 절반이 넘는 274건이 4~5월에 집중됐다. 원인을 보면 고사리를 꺾다 길을 잘못 들어선 경우가 40.9%로 압도적이다. 올해 들어서만 고사리 객 길 잃음 사고가 벌써 18건이 발생했다. 올해는 코로나19로 사회적 거리 두기가 권고되면서 사람이 적은 자연에서 봄의 정취를 느끼려는 사람들이 더 많아진 탓으로 풀이된다.
급기야 제주 경찰은 고사리 채취 객이 몰리는 일부 지역에 위도와 경도가 표기된 대형 리본을 산간 곳곳에 매달기도 했다. 신고 시 조난객 위치를 특정하기 쉽도록 선제 대응에 나선 것이다.
매년 이 무렵 서귀포시 남원읍 일대에서 열리는 한라산 청정 고사리 축제에는 전국에서 수만 명이 찾아 사람반 고사리반의 장관을 연출한다. 푸른 곶자왈 속에 울긋불긋한 사람들의 옷차림은 멀리서는 마치 꽃이 핀 듯 보이기도 한다.
제주의 고사리 채취는 5월 초·중순까지다. 이후에는 풀들이 무성해 고사리를 분별하기 어렵다.
제주의 4월은 일년 중 가장 생명력 넘치는 달이다. 고사리는 물론 쑥이며 꿩마농(’달래’의 제주어)이며 이제는 귀해진 두릅과 같은 봄 채소를 함께 장만할 수 있으니 이때만큼 분주하고 곳간이 두둑해지는 달도 없다. 귀한 것들이 흔할 때가 바로 봄, 지금 제주의 봄이다.
제주=문정임 기자 moon1125@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