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와 금융권이 27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대응책으로 내놓은 ‘취약 개인채무자 재기지원 강화방안’ 시행계획에 대해 오히려 취약계층의 재기 의지를 꺾는 대책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지원이 원금 상환을 잠시 미뤄주는 수준에 그친 데다 “지원을 받으면 신용등급이 떨어지고 대출과 카드 사용이 막힐 수 있다”는 단서까지 달렸다. 상환 유예 후에도 원금을 갚지 못할 정도로 어려운 사람은 지원조차 받을 수 없다.
금융위원회는 전 금융권이 코로나19 피해로 대출을 정상적으로 상환하기 어려운 취약 개인채무자를 대상으로 오는 29일부터 원금 상환유예를 시행할 예정이라고 이날 밝혔다. 지난 8일 제4차 비상경제회의에서 결정된 취약 개인채무자 재기지원 강화방안의 세부 내용을 확정한 것이다.
골자는 원금 상환을 6~12개월간 미뤄준다는 내용이다. 원금은 물론 이자 역시 면제는커녕 감면도 없다. 지원을 받더라도 이자는 정상적으로 갚아나가야 한다. 즉 원금 상환유예가 대책의 전부라는 얘기다. 심지어 금융위는 보도자료에 “유예기간 중 이자를 미납하는 경우 통상의 연체처리절차를 따르게 됨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는 경고문까지 달았다.
금융위는 “유예기간 동안 동 지원으로 인한 수수료나 가산이자 부과 등 추가 금융부담은 금지(사항)”라고 부연했지만 사족에 불과하다. 지원 대책을 받도록 하면서 그에 대한 비용 부담을 지우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기 때문이다. 빈약한 지원 수준을 감안하더라도 마찬가지다.
지원대상 범위마저 협소하다. 개별 금융사에 대한 신청은 남은 원금 상환기간이 한 달 미만인 경우에만 가능하다. 상환 방식에 따라 일시 상환은 대출 만기일, 분할 상환은 매달 돌아오는 원금 상황예정일이 기준이다. 업무 처리에 최대 8영업일(통상 5영업일, 서민금융대출은 1∼3영업일 추가 소요)까지 걸린다는 점을 생각하면 당장 4월 말~5월 초가 만기인 채무자는 촉박하다.
이명순 금융소비자국장은 “업무 처리 기간 때문에 원금 상환일을 넘기더라도 조건을 충족하면 지원하도록 금융사들과 의견을 모았다”며 “신청은 29일부터 받지만 28일이 만기인 채무자를 무자르듯 배제하는 것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3개월 미만의 단기연체가 있는 경우에는 미납금을 먼저 상환해야 지원받을 수 있다는 점도 큰 제약이다. 대출금을 이미 정상적으로 갚기 어려운 이들에게 미납금을 갚으라고 요구하는 것은 금융 당국과 금융사들이 상황의 심각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고밖에 볼 수 없다.
게다가 당국과 금융권은 유예 기간이 끝난 뒤 원금 상환이 어렵다고 판단되면 지원을 거절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들은 ‘상환유예를 지원받더라도 재기가 어려운 이들’을 지목해 신용회복위원회 채무조정, 법원 개인회생 같은 절차를 밟도록 안내하면서 이번 대책의 의미를 스스로 제한했다.
지원 내용에 비해 채무자가 감수해야 할 불이익이 크다. 금융위는 “상환유예를 받은 경우 개인 신용도 또는 금융이용에 불이익이 발생할 수 있다”며 5영업일 이상 연체 시 향후 3년간 연체정보로 활용되고 신규 대출과 카드 사용이 막힐 수 있다고 덧붙였다.
당국은 기존에 대상이 아니었던 이들에게 사전채무조정을 해줄 수 있도록 한 최소한의 예방책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이 국장은 “금융사들도 건전성 관리를 해야 하는 등 사정이 있는 상황에서 전 금융권과 협의해 이 정도 수준의 대책을 내놓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며 “작지만 코로나19로 소득 감소를 겪는 취약계층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는 차원에서 마련한 대책”이라고 설명했다.
금융위가 이번 대책을 발표하면서 배포한 보도자료는 요란하다. 제목을 비롯해 핵심 내용이 담겨야 하는 첫 장은 대책 마련에 참여했다는 기관과 담당자 이름으로 이미 가득 차버린 탓에 정작 중요한 제목은 가장 밑바닥까지 밀려났다.
명단에 이름을 올린 기관은 17곳, 담당자는 52명이다. 금융위는 서민금융과를 비롯한 3개과가, 금융감독원은 감독총괄국 등 6개국이 참여한 것으로 기록됐다. 금융위 관계자는 “보도자료 양식대로 명단을 작성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길어졌을 뿐 다른 의도는 없다”고 말했다.
가계대출 원금 상환유예 신청은 카카오뱅크와 케이뱅크가 다음 달 7일부터, 다른 금융사는 모두 오는 29일부터 받는다. 최종 접수일은 12월 말까지다.
대상 금융사는 은행, 보험사, 저축은행, 카드사, 캐피탈사, 상호금융(농협・수협・신협・산림조합・새마을금고)을 아울러 3700곳 정도다. 대출받은 금융사에 전화로 문의해 대상 여부를 확인한 뒤 해당자는 안내에 따라 온라인이나 방문 신청을 하면 된다.
지원을 받으려면 먼저 코로나19 확산이 본격화한 올해 2월 이후 실직・무급휴직‧일감상실 등으로 소득이 줄었음을 증빙해야 한다. 신청일 기준 가장 최근에 받은 1개월치 소득과 최근 3개월 평균 월 소득 중 한 가지가 지난해 평균 월소득보다 적으면 1차 합격이다. 소득이 줄었어도 가계생계비(복지부 고시 기준중위소득의 75%)를 뺀 월 소득이 해당 대출의 월 상환액보다 많으면 대상에서 제외된다.
대상 대출은 담보나 보증 대출을 제외한 개인 신용대출과 보증부 정책서민금융대출 및 사잇돌대출이다. 정책서민금융대출은 근로자햇살론, 햇살론17, 햇살론youth, 바꿔드림론, 안전망대출이다.
강창욱 기자 kcw@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