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 대형은행이 독식하다시피 한 채 손쉬운 영업 방식인 담보대출과 이자 장사에 안주하는 국내 은행산업의 기질적 게으름을 꼬집는 한국은행 보고서가 나왔다. IT(정보통신) 기술을 활용해 맞춤형 금융상품을 판매하는 빅테크 기업은 기존 은행권에 직접적 위협이 될 것으로 전망됐다.
김훈 한은 금융시스템분석부장 등은 27일 한은 조사통계월보에 실린 ‘우리나라 은행산업의 미래와 시사점’ 보고서에서 “국내 은행산업의 과점 구조가 지속되면서 담보대출을 중심으로 한 자금운용 편중현상이 해소되지 않아 다양한 금융수요 충족을 위한 혁신 유인도 부족한 모습”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국내 은행의 수익구조가 이자이익에 치우치면서 저금리·저성장 국면이 지속되는 가운데 수익성 제고도 제약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보고서가 지적하는 국내 은행권 혁신 부족의 근본 배경은 과점 구조다. 1990년대 말 외환위기 당시 32개였던 은행은 합병 등을 거쳐 현재 19개로 줄면서 산업 집중도가 높아졌다. 은행별 점유율을 토대로 산출한 집중도 수치 ‘HHI지수’는 외환위기 이전 집중도가 낮은 800 이하에서 2002년 1200 가까이로 수직 상승한 뒤 현재까지 집중도가 다소 높은 수준인 1000 이상을 이어왔다.
김 부장 등은 “자산규모가 큰 대형은행 위주로 집중화 현상이 나타남에 따라 과점구조가 고착화 되어 있는 상태”라고 “미국 일본 등 주요국에 비해서도 집중도가 높은 모습”이라고 전했다.
전체 은행산업 실적에서 상위 5개 기업이 차지하는 비중(CR5)은 2018년 예수금 기준으로 한국이 81.4%로 미국(56.1%) 일본(56.8%)보다 크게 높다. 한국은 전체 은행권 예수금의 80% 이상을 상위 5개 은행이 거머쥐고 있다는 뜻이다.
은행산업 과점화는 국내 은행의 자금운용 편중을 지속시키는 환경으로 작동하고 있다. 지난해 말 국내 은행권이 조달한 자금의 78.2%가 예·적금 등 예수금이었고, 전체 운용자금의 73.9%를 부동산 등을 담보로 한 대출 위주로 운용했다.
국내 4대 은행의 대출채권 비중은 국민은행이76.9%, 우리은행 74.5%, 하나은행 72.4%, 신한은행 69.5%였다. 뱅크오브아메리카, 씨티은행, HSBC 등 주요 해외은행은 대출채권 비중은 35.2~49.4%에 그쳤다. 이어 유가증권 28.8~45.9%, 현금·예치금 5.7~17.9%로 “자산 구성이 국내 은행에 비해 비교적 균일하게 형성돼 있다”고 보고서는 설명했다.
김 부장 등은 “아울러 국내은행 간에도 자산구성이 매우 유사한 모습을 보이고 있어 은행들의 영업행태 쏠림현상이 지속되고 있다”며 “은행 간 영업경쟁이 심화되는 가운데 금리 상승기에 대출이 동반 부실화될 경우 횡단면 측면의 시스템리스크가 증가하고 경기변동 진폭도 확대시킬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다.
‘횡단면 측면의 시스템리스크’는 시스템 장애로 금융 기능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못하면서 실물 경제 등 다른 부문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위험을 말한다. 국내 은행의 대출 부실이 은행산업의 손실로만 끝나지 않고 국내 경제 전반을 흔들 수 있다는 뜻이다.
저금리·저성장 기조 속에서 국내 은행의 돈벌이 수단이 여전히 이자에 쏠려 있다는 점도 문제로 지적됐다. 지난해 국내 은행권 전체 이익 중 이자이익이 차지하는 비중은 86.2%로 비이자이익 비중(13.8%)의 6배가 넘었다. 해외 주요 은행(50.1%~63.7%)과 비교해도 ‘상당히 높은 수준’이라고 보고서는 평가했다. 이자이익 비중이 2005년 90.8%에서 2010년 83.8%로 낮아졌다가 최근 다시 상승한 점은 은행들이 이자 장사에 의존하는 관행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보고서 저자들은 “수익 구조가 이자이익에 편중된 상황 하에서 저금리 기조 지속으로 순이자마이 축소되고 있는 데다 국내 자산시장 협소 및 해외진출 제약, 규제 강화, 저성장 등으로 인해 대출자산 규모 확대도 어려운 상황”이라고 기술했다. 은행 대출 증가율은 2009~2019년 평균 5.9%로 2004~2009년(11.3%)의 절반 수준으로 떨어졌다.
보고서는 국내 은행이 수익성을 높이기 어려운 처지에 놓이면서 디지털 전환을 통한 영업경쟁력 강화, 자본확충을 통한 안정성 제고 같은 저금리·저성장 대응 전략도 원활하게 수행하기 어려울 것으로 봤다.
이런 상황에서 국내 은행을 위협하는 것은 이른바 ‘빅테크’ ‘핀테크’ 기업이다. 특히 전자상거래 플랫폼 등을 보유한 대형 IT기업인 빅테크 기업은 기술과 고객 네트워크, 자본 등을 활용해 금융서비스 시장으로 사업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저자들은 “비대면 전자상거래 규모가 늘면서 이를 기반으로 하는 빅테크·핀테크 기업이 경쟁상대로 부상하고 있다”며 “빅테크 기업은 네트워크 효과를 통해 빠르게 성장하면서 진출 영역을 확장하는 한편 시장지배력을 점차 확대하며 핀테크 기업에 비해 기존 은행에 대한 직접적 위협요인으로 부상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들은 다양한 금융거래 디지털 플랫폼 제공, 빅데이터 등을 활용한 금융상품 출시 같은 노력이 국내 은행권에 필요함을 강조했다. 고령층과 밀레니얼 세대에 특화된 금융상품 개발, 편리한 디지털 디바이스 활용 환경 구축도 시급한 과제로 제시했다.
강창욱 기자 kcw@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