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최장수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기억되는 김정렴(사진)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 회장이 지난 25일 향년 96세로 별세했다. 고인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국정철학에 따라 경제성장의 기틀을 닦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고인은 1969년 10월부터 1978년 12월까지 9년3개월간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냈다. 정통 경제관료였던 그는 대통령을 뒷받침하는 비서실장으로서의 존재감을 과시하지 않았다는 점이 긴 시간 청와대에 머문 배경으로 꼽힌다. 그는 정치 회고록 ‘아, 박정희’에서 “청와대 비서실을 구성하는 수석비서관·비서관·행정관은 대통령의 그림자처럼 행동해야 하고, 대통령이란 큰 나무의 그늘에서 존재가 있는 듯 없는 듯 묵묵히 일해야 한다”며 “그 그늘을 벗어나 양지로 나와 존재를 과시하면 안 된다고 믿는다”고 밝혔다.
1924년생인 고인은 1944년 한국은행의 전신인 조선은행에 입행했다. 이후 강제징집돼 일본군에 배속됐다가 히로시마에서 일제 패망을 맞았다. 당시 미군이 투하한 원자폭탄의 피폭 후유증을 앓았다. 그는 6·25전쟁에 참전한 뒤 한국은행으로 돌아와 1차 화폐개혁에 참여했다. 1967년 상공부 장관이 됐고, 1969년 ‘3선 개헌안’이 통과된 직후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의 후임으로 대통령 비서실장에 올랐다.
회고록 ‘최빈국에서 선진국 문턱까지’에 따르면 고인은 비서실장직을 권하는 박 전 대통령에게 “각하, 저는 경제나 좀 알지 정치는 모릅니다. 비서실장만은 적임이 아닙니다”라며 사양했다. 그러자 박 전 대통령은 “경제야말로 국정의 기본이 아니오. 백성들이 배불리 먹고 등이 따뜻해야 정치가 안정되고 국방도 튼튼히 할 수 있지 않소”라며 그를 설득했다고 한다.
김종필 전 국무총리는 생전에 고인에 대해 “대통령의 신임이 두터워 차지철(경호실장)과 김재규(중앙정보부장)가 비서실장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고인이 비서실장에서 물러나고 10개월 뒤인 1979년 10월 김재규 부장이 박 전 대통령과 차지철 실장을 살해하는 10·26사태가 벌어졌다. 고인은 1999년부터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 이사, 2007년부터 사업회 회장을 맡았다. 미래통합당 비상대책위원장에 내정된 김종인 전 총괄선거대책본부장이 고인의 조카사위다. 김 전 위원장은 부인 김미경 이화여대 명예교수와 함께 26일 조문했다.
유족은 희경·두경(전 은행연합회 상무이사)·승경(전 새마을금고연합회 신용공제 대표이사)·준경(전 한국개발원 원장)씨와 사위 김중웅(전 현대증권 회장, 현대그룹 연구원 회장)씨다. 빈소는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 14호실, 발인은 28일 오전 8시30분, 장지는 서울추모공원이다.
심희정 기자 simcit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