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개발, ‘길냥이’ 이주 매뉴얼도 세운다

입력 2020-04-27 10:10 수정 2020-04-27 10:10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 재개발구역 고양이 구조 활동가들의 모임 '이문냥이 프로젝트'가 구조한 새끼고양이. 이문냥이 프로젝트 제공

“저기 4층에서 태어난 지 2주된 새끼 고양이를 구조했어요”

지난 17일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 재개발구역의 한 공가에서 고양이 포획 틀을 설치하던 ‘캣맘’ 권보라씨가 연립주택 한 채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연립주택은 얼마 전 재개발을 앞둔 지역주민들이 이주하면서 빈집이 돼 인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건물이었다. 권씨는 구해낸 새끼고양이를 재개발 구역의 한 공가에 임시 보호한 후 소셜네트워크 계정 ‘이문냥이 프로젝트’를 통해 수유처에 보냈다. 권씨와 또 다른 캣맘 문성실씨가 주축이 된 이문냥이 프로젝트가 지난 두달여간 이런 식으로 구조한 고양이는 90여 마리에 달한다.

이문냥이 프로젝트 활동가들이 지난 17일 고양이 포획틀을 손에 든 채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 재개발구역을 걷고 있다. 골목에는 발 디딜 공간을 찾기 어려울만큼 많은 쓰레기가 버려져 있다. 이택현 기자


거리 생활에 익숙해진 고양이들에게도 재개발 구역의 생활은 유독 힘겹다. 철거가 시작되면 깔려 죽는 고양이들이 부지기수고 거리에 떨어진 건물 잔해와 유리 파편에 상처를 입기도 한다. 영양실조와 구내염, 허피스 등 질병도 달고 산다. 중성화 수술을 하지 않은 개체가 많아 이런 상황에서 번식이 이어지는 것도 문제다. 이문냥이 활동가들은 최근 각각 새끼 4~6마리씩을 밴 고양이들을 구조했는데, 이 중 무사히 태어난 개체는 거의 없었다.

구조 시간이 길어짐에 따라 고양이들의 경계심이 심해지면서 구조 활동도 어려워지고 있다. 최근에는 포획 틀에 적응한 고양이들이 미끼용 먹이만 건져 먹고 사라지는 일도 허다하다. 그렇다고 구조할 고양이가 줄어드는 것도 아니다. 이문냥이 활동을 돕고 있는 서울과학기술대 동물권보호동아리 동그라미 이진복씨는 “늦은 밤이면 아직도 눈에 보이는 고양이가 많다”고 말했다. 과기대 학생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캣맘들만으로는 포획 틀 설치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울 상황이다.

반면 철거작업은 본격적으로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3주 전부터 건물을 철거하고 중장비가 들여올 수 있는 길을 내고 있다. 고양이 밥자리로 가는 길도 건물 잔해와 유리 파편, 쓰레기가 가득했고 가림막이 처져 있었다. 활동가들이 포획 틀을 설치하러 가는 일이 위태롭게 느껴질 만큼 환경이 악화한 상태였다. 철거작업은 앞으로 몇 달씩 이어지지만, 고양들이 언제까지 터 잡고 살 수 있을지, 활동가들은 언제까지 구역 내에 머무를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영역 동물인 고양이는 재개발이 시작돼도 스스로 구역을 떠나지 않는다. 오히려 인적 드문 공가에 터를 잡고 살다가 철거와 함께 죽음을 맞이한다. 최근에야 이에 대한 문제의식이 커지고 있다. 27일 서울시에 따르면 서울시는 재개발 구역 고양이 구조작업 시범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서울시가 지난해 관련 조례를 발표한 데 이어 처음으로 구체적인 행동에 나선 것이다.

이문냥이 프로젝트 활동가들이 고양이 출몰지역에 설치해놓은 포획틀. 이택현 기자


서울시는 ‘동물권행동 카라’를 시범사업자로 선정해 서울 시내 2~3개 재개발 구역에서 사업을 시행할 예정이다. 사업은 재개발 진행시 관할 자치구와 동물보호단체 등이 구역 내 고양이를 관리하고 구조하는 방법에 대한 매뉴얼을 만드는 게 목표다.

매뉴얼의 핵심은 재개발 사업시행인가단계 이후 자치구와 지역 캣맘, 주민들이 함께 고양이 중성화 수술과 밥자리 옮기기 작업 등을 병행해 자연스럽게 이주시키는 것이다. 서울시 관계자는 “이주작업이 시작돼 공사장 가림막이 올라가고 나면 이미 너무 늦는다”며 “주민들이 지역에 남아있을 때 함께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금까지는 지역 캣맘들이 재개발 조합과 시공사의 선의에 기대어 구조작업을 펼치는 게 전부였다. 그러다 보니 구조작업도 효율적이지 못했고 재개발 조합도 공사 일정이 연기되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로 난처한 상황에 빠졌다. 현장활동가들은 고양이 구조작업이 공사일정을 늦추는 일은 없다고 강조하지만, 재개발 조합과 건설사의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서라도 체계적인 관리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현장에서는 여기에 더해 이주·철거 단계 개입에도 신경 써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이문동 사례를 들여다보면 재개발 구역에는 크게 3차례에 걸쳐 고양이들이 유입된다. 먼저 길고양이 평균 수명의 두배가 넘는 11살 얼룩 고양이 ‘마당쇠’처럼 지역 주민들과 오래 함께한 개체는 구조가 쉽다. 마당쇠는 지난 3월 가장 먼저 구조된 개체 중 하나다.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 재개발구역 고양이 구조 활동가들의 모임 '이문냥이 프로젝트'가 구조한 고양이 '마당쇠'. 이문냥이 프로젝트 제공


이주가 시작되면 떠나는 주민들이 또 고양이들을 거리에 버린다. 이문냥이 활동가들과 두 달 넘게 숨바꼭질을 벌이고 있는 노르웨이숲 품종묘 ‘탄이’가 대표적이다. 자연상태에서는 길고양이가 품종묘를 낳을 가능성이 작다. 탄이처럼 사람의 손을 탄 고양이들은 오히려 인간을 잘 알고 경계심이 강해 잘 잡히지 않는다.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 재개발구역 고양이 구조 활동가들의 모임 '이문냥이 프로젝트'가 구조한 고양이 '탄이'. 이문냥이 프로젝트 제공

재개발이 지정 해제된 인접 구역에서 인적없는 공가를 찾아 흘러 들어가는 개체도 많다. ‘항우’는 재개발구역 지정 해제된 인접 지역에서 캣맘들의 보호를 받던 개체다. 이후 재개발 구역 철거가 시작되며 가림막이 설치됐지만, 여전히 막히지 않은 주민 보행 통로로 유입됐다. 항우는 최근 재개발 구역 가장 깊은 곳에서 포획됐는데, 인적이 드문 공가를 전전하다 더 깊이 파고든 것으로 보인다.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 재개발구역 고양이 구조 활동가들의 모임 '이문냥이 프로젝트'가 구조한 고양이 '항우'. 이문냥이 프로젝트 제공

서울 시내에만 재개발 구역이 600여곳이고 거리에서 살아가는 고양이는 수도 없이 많은 상황에서 캣맘들의 활동에 큰 의미가 없다는 비판도 나온다. 하지만 문씨는 “‘다 못 구한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지만 2년이든 3년이든 제 명대로 살 수 있던 아이들을 죽게 그냥 둘 순 없다”며 “고양이들이 살던 곳도 철거하는 것이나 마찬가진데 최소한 밖으로 탈출시켜주는 노력은 해야한다”고 강조했다.

이택현 기자 alley@kmib.co.kr